(서울=연합인포맥스) 고유권 기자 = 회사채 발행 때 수요예측을 반드시 거치도록 한 제도가 본격 시행됐지만 '반쪽짜리'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들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주관사를 따내기 위한 증권사들의 경쟁에 금리가 되레 떨어지는 현상마저 나타나면서 수요예측 의무화 전후(前後)로 달라진 게 무엇이냐는 투자자들의 볼멘소리가 커지고 있다.

9일 금융시장에 따르면 지난 달 17일 수요예측 의무화가 본격화 한 이후 회사채를 발행하기로 한 기업들은 한국캐피탈, STX, AJ렌터카, 현대백화점, 두산중공업, SK 등이다.

이들 외에도 발행 검토 단계에 있는 기업들도 3∼4곳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한국캐피탈은 지난 주 가장 먼저 수요예측을 실시했고, STX와 AJ렌터카도 수요예측을 거쳤다.

현대백화점, 두산중공업, SK 등은 주관사를 선정하고 금리밴드도 결정한 상태로 수요예측을 앞두고 있다.

한국캐피탈은 1.5년물과 2년물로 총 7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인데 수요예측에서 금리가 각각 4.70%와 4.90%로 결정됐다.

수요예측 때 제시했던 금리밴드(4.70∼4.80%/4.80∼4.90%) 이내에서 발행금리를 확정했다.

AJ렌터카의 경우 2년물과 3년물로 600억원을 발행하는데 발행금리가 각각 4.86%와 5.00%로 예정 금리밴드(4.90∼5.00%/5.10∼5.20%)를 모두 밑돌았다. AJ렌터카 입장에서는 비용을 더 줄인 셈이다.

2년물로 600억원을 발행하는 STX의 발행금리(6.90%)는 금리밴드(6.60∼7.10%)의 중간값 수준에서 결정됐다.

수요예측에 긴장했던 발행사들 입장에서는 상당히 만족스러워 할 만한 결과였다.

그러나 시장에서 예상했던 금리와는 다소 상이한 결과라는 지적들이다.

한국캐피탈이 4월 초 발행한 2년물 금리는 5.35%였고, 3월에 발행한 1년물 금리는 5.40%였다. 2년물의 자기 민평금리도 5.20% 수준에서 형성돼 있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지고 있는데다 크레디트 스프레드의 축소세가 지속되는 것을 감안하면 금리가 하락할 여지는 있지만 그 폭이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AJ렌터카와 STX도 별반 다르지 않다.

문제는 앞으로 수요예측이 예정된 'AA+'급 기업들이 제시한 금리밴드다.

현대백화점은 3년물로 1천5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할 예정인데 수요예측을 위해 제시한 금리밴드는 국고채 3년물에 19∼25bp다.

3년물과 5년물로 각각 1천억원과 1천500억원 등 총 2천500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하는 SK는 각각 국고3년+(29∼36bp), 국고5년+(29∼35bp)로 금리밴드를 내놨다.

공통적으로 금리밴드의 상단을 이전에 회사채를 발행할 당시의 스프레드 수준에 맞춰놓고 있다.

현대백화점이 지난 달 회사채 발행할 당시 가산 스프레드는 24bp였고, SK와 신용등급이 같은 SK에너지가 지난 달 발행한 3년물 회사채의 스프레드는 36bp였다.

결국 이전보다 더 금리를 낮추면 낮췄지, 높여서는 발행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신용등급이 'A+'인 두산중공업은 5년물 회사채로 2천억원의 자금을 조달할 예정인데 제시한 금리밴드는 국고5년+(43∼44bp)였다. 두산중공업의 자기 민평금리와 비교할 때 상당히 공격적인 수준이다.

증권사의 한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한국캐피탈이나 STX 등은 어차피 리테일 수요가 있어 결정된 금리에 큰 논란은 없어 보이지만 현대백화점이나, SK, 두산중공업이 제시한 금리밴드는 지나친 감이 있다"면서 "이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방증하는 결과다"고 지적했다.

대표 주관사를 선정하고서 수요예측을 위한 금리밴드를 결정할 때 여전히 발행사의 입김에 휘둘리고 있다는 게 이 애널리스트의 설명이다.

그는 "수요예측이 안들어오더라도 인수단에서 인수를 할 것이기 때문에 금리밴드를 더 높이지 않으려는 것 같다"며 "결국 주관사를 따내려는 증권사들의 경쟁이 제도 도입 이전과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강조했다.

다른 증권사의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주관사를 선정하는데 있어 여전히 발행사의 힘이 쎄기 때문에 금리를 좋게 제시하는 곳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일부 증권사는 민평을 훨씬 밑도는 공격적인 금리와 함께 1천억원대의 인수 조건을 제시해 주관사를 따낸 경우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일부 회사채 운용 기관들도 수요예측을 통한 금리 결정 과정에 볼멘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회사채 발행량이 급감하면서 운용 포트폴리오에 담을 '물건'이 없게 되자 발행사와 주관사 사이에서 '사실상' 정해지는 낮은 금리에라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증권사의 크레디트 애널리스트는 "시장 참여자가 소수이다 보니 수요예측을 통한 시장가격 형성이 아직은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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