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스위스 교통의 중심지인 취리히 중앙역 정문 앞에는 알프레드 에셔의 동상이 있다. 19세기 스위스 의회 의장을 지낸 저명한 정치가이자 스위스 철도산업을 일으킨 사업가이기도 하다. 에셔는 스위스가 유럽과의 무역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는 철도 인프라 확충이 우선이라고 봤다. 그렇게 시작된 '에셔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은행이 'Schweizerische Kreditanstalt'다. 1856년 7월 5일의 일이다. 크레디트스위스(CS)의 전신이다. 에셔는 1856년부터 1877년까지 CS의 이사회 의장을 맡아 스위스 철도산업은 물론 다양한 분야의 산업과 기업을 부흥시키는 큰 역할을 했다. CS는 스위스의 '산업은행'과 같은 역할을 했고 오늘날 스위스가 제조업과 금융강국으로 성장하는데 핵심적인 주춧돌이 됐다.

그런 CS가 순식간에 무너지면서 경쟁사인 UBS로 넘어갔다. 단돈 32억3천만달러에. 시가총액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금액에 쫓기듯 수일 만에 경쟁사의 품에 안길 수밖에 없었다. 170여개국에 진출하고, 약 50개 나라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4만6천명이 넘는 직원을 둔 세계 9위의 투자은행(IB) CS는 설립 167년 만에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졌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속에서 베어스턴스가 무너져 JP모건에 안기고, 메릴린치는 1천달러도 안 되는 돈에 뱅크오브아메리카(BoA)에 팔렸다. 리먼브러더스는 사겠다는 곳도 없어 파산했다. 대마불사(大馬不死)의 공식은 15년도 안 돼 또다시 깨졌다. 금융시장 암흑의 역사는 불과 며칠 만에 반복됐다.

CS가 망하게 된 이유를 두고 여러 가지 분석들이 나오지만, 사실 CS의 위기는 예고돼 있었다. 파산한 영국의 핀테크업체 그린실 캐피털에 대한 과도한 투자와 아케고스의 마진콜 사태에 따른 대규모 손실은 CS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발점이 됐다. 지난해에는 내부 고발자가 3만명의 고객 명단을 폭로하는 사건까지 터지면서 불법 자금 창구라는 오명까지 쓰게 됐다. 지난 14일 발표한 연례보고서에서 CS는 "경영진은 그룹의 내부통제와 절차가 효과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쉽게 말해 회사가 엉망이 됐다는 고백이었다. 가장 깨끗해야 할 은행의 재무구조와 경영 상황에 대해 경영진조차 믿을 수 없는 상태라고 '발설'해 버리니 돈을 맡길 예금주가 어디에 있겠는가. 뱅크런 조짐이 나타나고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5년 만기)은 1,300bp까지 치솟았다. 가상자산 시장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코인의 변동성이 세계 9위 은행에서 나타났다.


크레디트스위스 로고
[크레디트스위스 홈페이지 캡처]



미국의 실리콘밸리은행(SVB)부터 CS까지 은행의 위기에 전 세계가 초긴장 상태다. 가장 안전해야 할, 그리고 최종 대부자인 중앙은행의 역할을 보완해 줄 은행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깨지고 있다. 오죽하면 은행 위기 상황에서 가장 휘발성이 크고 위험하다고 지적되는 가상자산가격이 튀어 오를까. 은행에서 빠져나온 예금이 가상자산시장으로 옮겨가는 혼돈의 시대, 즉 카오스(Chaos) 그 자체다.

은행은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경제를 움직이는 혈관이다. 세상에 돈을 돌게 하는 근원적 시스템이다. 예금을 받아 대출하고, 레버리지가 쌓이면서 그 규모는 더 확장한다. 하지만, 신뢰가 깨지는 순간 자금중개를 위한 시작점인 예금은 이탈한다. 은행의 본질적인 생존 이유는 사라지게 된다. 결국은 믿음에서 시작된 은행시스템이 금융시장과 실물경제도 망가뜨리는 시발점이 된다.

그렇다고 무너질 수밖에 없는 대마(大馬)를 무조건 떠안고 있을 수는 없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수많은 대마가 무너졌지만, 금융시장은 빠르게 자정작용을 거쳐 복원됐다. 이번 CS 사태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CS처럼 내부통제가 엉망이 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 은행시스템이 안정화되도록 더욱 강력한 감시와 감독이 있어야 한다. 은행의 역할을 하도록 해주는 것 자체가 인센티브다. 인센티브는 감시와 감독을 전제로 한다. 이번 사태가 2008년 금융위기 때와 같은 일로 번질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는 하지만,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일은 이유가 있다. 우리 금융감독당국도 "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말만 반복하지 말고 은행들이 시스템을 제대로 유지할 정도의 강력한 내부통제 체계를 갖췄는지 재점검해야 한다. 돈 벌기는 어려워도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다.

(정책금융부장)

pisces738@yna.co.kr
(끝)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에서 13시 45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