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시장 가운데 하나인 미국 국채시장은 요지경이 되고 있다. 각종 거시 경제지표 등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있어서다. 엄청난 수급 부담에 따른 요인도 무시되고 있다. 모두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연준) 덕분이다.

◇ 연준, 테일러 준칙(Taylor's rule) 잊은 지 오래돼

미 국채 10년물은 지난 9일 장중 한때 1.46%를 기록하면서 100일 이동평균선이 있는 1.47%도 아래로 뚫었다.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시장 전망치를 밑돌 것이라는 기대를 반영한 영향으로 풀이됐다.

이를 두고 알리안츠의 포트폴리오 매니저인 마이크 리델 등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 4월에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다(bonkers)"고 평가하기도 했다. 당시에도 미 국채 수익률은 양호한 경제지표 등에도 되레 하락세를 보였다.

21조 달러에 이르는 미국채 시장은 양호한 경제지표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길을 잃은 지 오래다.

연준이 테일러 준칙을 무시한 지도 오래됐기 때문이다. 테일러 준칙은 미국 경제학자 존 테일러 교수가 제시한 통화정책 운용 준칙이다. 중앙은행은 실질 경제성장률(GDP)과 잠재 성장률의 차이를 의미하는 GDP와 실제 물가상승률과 목표 물가 상승률의 차이인 인플레이션 갭에 가중치를 부여해 금리를 조정해야 한다.

연준이 지난 3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제시한 올해 미국의 성장률 전망치는 무려 6.5%다. 연준의 삼인자로 꼽히는 존 윌리엄스 뉴욕 연방준비은행(연은) 총재는 올해 미국의 성장률이 7%에 이를 것이라고 점치고 있다. 윌리엄스 총재는 지난달 초에 "완화적인 금융 여건, 강력한 재정 지원, 광범위한 백신 접종으로 올해 경제성장률이 1980년대 초 이후 경험해보지 못한 속도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기저효과 등을 고려해도 미국 경제 규모를 감안하면 GDP 갭 등은 빛의 속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다보스 포럼으로 유명한 세계경제포럼(WEF)이 추정한 미국의 잠재성장률은 2%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연준 제동 장치 대신 가속장치만 가동

인플레이션은 또 어떤가. 월가는 5월 CPI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7% 올랐을 것으로 점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2% 올라 시장을 놀라게 했다. 당시 물가는 2008년 9월 이후 13년 만에 최대폭으로 올랐다. 에너지와 식품 가격을 제외한 근원 CPI도,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3.4% 올랐을 것으로 전망됐다. 연준의 인플레이션 목표는 2% 수준이다.

제롬 파월 의장 등 연준 고위 관계자 대부분은 고용 부진과 공급망의 병목 현상 등을 이유로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일 것이라는 주장을 줄기차게 이어가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연준의 목표치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되는 가운데 미국채 수익률이 빅 랠리를 이어가는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bonkers)' 시장 상황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연준은 인플레이션 압력에도 초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상당 기간 이어갈 것이라는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도 강경할 정도로 비둘기파적인 연준의 행보를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과속은 늘 위험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제동장치 혹은 브레이크에 발을 올려야 할 연준이 가파른 경기회복에도 완화적인 시그널만 강화하는 등 가속장치만 가동하는 데 대한 우려의 시선도 늘고 있다.

알리안츠의 고문이자 세계 최대의 채권 운용사인 핌코의 전 최고경영자(CEO)였던 모하메드 엘-에리언은 속담을 인용해 "연준이 변호사처럼 행동한다"고 지적했다. 변호사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대한 근거가 부실할 때도 100% 확신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속담을 소개하면서다. 연준은 인플레이션 압력이 가중되고 있다는 각종 지표가 누적되고 있지만, 변호사처럼 '일시적'이라는 확신에 찬 주장만 거듭한다는 게 에리언의 진단이다.

에리언은 이러다가 연준이 급브레이크를 잡아야 할 상황에 몰릴 수도 있다며 이웃 나라인 캐나다의 중앙은행(BOC)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투자자들도 '제정신 아닌 미국채 시장에 한몫

이른바 '제정신이 아닌' 미 국채 시장 상황을 이끈 데는 일본 투자자도 한몫한 것으로 월가는 풀이하고 있다. 일본 투자자들은 채권수익률곡선 통제(YCC),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T) 등 중앙은행의 비전통적 지원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일본 은행(BOJ)은 심지어 발권력을 동원해 일본 증시 상장지수펀드(ETF)도 직접 사주는 방법으로 시장을 지원하고 있다. 일본 투자자들은 중앙은행이 시장의 응석을 결국은 받아들일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미국채 수익률이 하락할 때마다 일본계 자금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는 점은 달러-엔 환율 동향을 통해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다.

채권시장은 그나마 제정신이 아니라는 자성의 목소리라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10배는 우습고 100배나 오른 종목이 속출하는 증시, 그리고 가상화폐 시장은 제정신일까. 모두 연준 등 중앙은행의 돈으로 잔치를 벌이면서 자신들의 능력인 것처럼 착각하는 건 아닐까. (배수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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