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한국 금융시장이 프락시 헤지(proxy hedge)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자산매입 규모 축소를 일컫는 테이퍼링(tapering) 연내 조기 도입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어서다. 유동성이 풍부한 한국은 연준이 유동성을 옥죌 때마다 중국 등 신흥국의 대체 헤지 시장으로 주목받았다. 프락시 헤지는 유동성이 좋지 않은 통화 거래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비슷한 변동성을 가지면서 유동성이 풍부한 다른 통화로 헤지를 대신하는 투자 기법을 일컫는다.

◇연내 테이퍼링 가시화

연준 위원들은 18일(현지시간) 공개된 의사록을 통해 월 1천200억달러 규모의 채권매입을 축소하는 테이퍼링을 올해 안에 시작할 것이라는 데 무게를 실었다. 지난 7월 27~28일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에서 대부분의 참가자는 앞으로 경제가 예상대로 광범위하게 발전할 경우 위원회의 '실질적인 추가진전' 기준이 충족되는 것으로 봤기 때문에 자산매입 속도를 줄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다수의 위원은 다음 회의에서 채권 테이퍼링에 대한 전망을 평가하기로 했다. 위원들은 7월 회의에서 올해 경제가 위원회 지침에 명시된 테이퍼링 임계값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이에 앞서 미 연준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해 3월부터 사실상 제로금리에서 국채와 주택저당증권(MBS)을 월 1천200억 달러나 사들이는 양적완화까지 단행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4조 달러 규모로 실시했던 양적 완화의 2탄에 해당한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한 유동성 공급은 5조 달러에 이르는 등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을 훌쩍 뛰어넘었다. 풍부한 유동성 덕분에 미국 뉴욕증시에서 다우존스30 산업평균지수는 지난해 18,000 수준에서 지난 16일 기록한 52주 신고가 기준 35,631까지 치솟았다.

◇브라질 등 일부 국가는 벌써 '테이퍼 텐트럼'

월가에서는 이 가운데 25%가량은 신흥국 금융시장 등에 흘러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초 완화적인 통화정책 정상화를 검토하고 있는 미국으로 환류할 경우 신흥국 금융시장은 심각한 내상을 입을 수 있다.

브라질이 최근 기준금리를 100bp나 올렸지만, 헤알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외국인 투자자금이 빠른 속도로 이탈하는 등 사실상 '긴축발작(테이퍼 텐트럼:Taper Tantrum)'이 신흥국을 중심으로 가시화된 것으로 풀이된다. 테이퍼 텐트럼은 미국 양적 완화 종료로 투자자들이 자금을 회수해 신흥국의 주가와 통화가치가 급락하는 사태를 일컫는다.

한국 금융시장도 프락시 헤지 대상으로 전락할 경우 테이퍼 텐트럼에 버금가는 충격을 받을 수 있다. 미국이 초 완화적인 통화정책을 정상화하기 시작하면 중국 위안화와 동조화 경향이 짙으면서도 파생시장 등이 상대적으로 발달한 한국의 원화가 집중 공격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국채 10년물 수익률이 연 2% 수준에 근접하면 신흥국에 투자된 글로벌 유동성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 원화 vs 위안화 환율 동향 보면 프락시 헤지 조짐

테이퍼링이 연내 실시될 것으로 점쳐지면서 외국인은 이번 주에만 7조 원을 국내 증시에서 순매도하는 등 연초대비 28조 원 규모의 순매도세를 기록하고 있다.

같은 기간 코스피 지수는 2,944에서 3,158로 상승했다. 해당 기간에 달러-원 환율은 달러당 1,082원 수준에서 1,168원 수준으로 치솟았다. 절하율이 무려 8%에 육박한다.

중국 상하이지수는 연초 3,502 수준에서 3,485 수준으로 하락세로 돌아섰다. 중국 당국이 빅 테크 기업 등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면서다. 페그제를 고수하고 있는 중국 위안화는 역외 기준으로 연초 달러당 6.50위안 수준에서 지난 18일 뉴욕 종가 기준으로 6.48 위안으로 하락하는 데 그쳤다. 주요 주가지수가 큰 폭으로 하락했지만, 위안화 수준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의미다.

원화가 위안화의 프락시 통화로 활용됐다는 심증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해당 기간에 한국은 코스피 지수가 올랐지만, 원화가 큰 폭으로 절하된 데 비해 주요 지수가 하락한 중국은 위안화가 견조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테이퍼링과 중국의 규제 강화 사이에서 중국 위안화의 `프락시'로 전락해 이른바 '현금지급기'가 된 원화만 내상을 입은 결과로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기재부보다는 한국은행이 적극 나서야

과도하게 풀렸던 유동성이 미국 등으로 환류할 때는 신흥국 등이 항상 내상을 입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 풀린 유동성이 환류할 때는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했고 파키스탄도 구제금융 신청 대열에 합류했다. 선진국 가운데에도 재정이 튼튼하지 못한 이탈리아 등 일부 국가도 국채금리가 치솟으면서 나라가 거덜 나기 직전까지 곤두박질쳤다.

이제부터는 FX 스와프 포인트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외화자금시장의 바로미터인 FX 스와프 포인트가 외국인 자금 동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될 수 있어서다. 주식과 채권 시장에서 외국인 매도세가 계속될 경우 한국은행 등 당국은 좀 더 과감한 시장 안정 조치를 단행할 필요가 있다.

외환 당국인 기획재정부는 운신의 폭이 제한될 수 있어서다. 기재부는 미국 재무부의 환율 보고서 등을 의식해야 한다.

미 연준 등 글로벌 중앙은행은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다. 우리도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활용해 적극적으로 시장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다. 당국이 강한 의지를 보여야 한국이 프락시 헤지 대상으로 전락하는 신세를 방치할 수 있을 듯하다.(배수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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