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준 한국기업평가 IS실장

(서울=연합인포맥스) "금융위기는 사람들이 금융 안정성에 대한 의구심을 갖기 시작할 때 발생한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더글라스 다이아몬드 시카고 대학 교수의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 말은 요즘 들어 국내외를 막론하고 점점 더 현실감을 더해가고 있다. 밖으로는 크레디트 스위스의 위기설과 FTX 파산, 안으로는 레고랜드 사태와 일부 보험사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이슈 등 주변이 온통 살얼음판이다. 긴축과 금리인상이 어느 정도 예견된 악재였다면, 지금은 설상가상으로 여기에 신뢰의 위기까지 겹치면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는 형국이다.

위기의 발생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기업 신용위험에 대한 우려를 자극한다. 주지하다시피 신용위험의 극단적 형태가 바로 '부도(Default)'인데, 채권시장에서 부도만큼 큰 신용사건은 없기에 위기가 불거질 때마다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미 글로벌 경제분석기관들은 내년도 전 세계 기업들의 부도증가 가능성에 대해 일제히 경고하고 나섰고, 국내에서도 일부 건설사들의 부도설이 나도는 등 위기 전후의 전형적인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올해 3분기에 사상 최대 실적을 거양한 금융지주사들마저 CDS 프리미엄 급등을 겪고 있을 정도다.

사실 국내 채권시장에서는 최근 몇 년간 이렇다 할 기업부도가 전무했다. 그런 만큼 비교적 오랜 기간 익숙해져 온 이른바 '신용평가 태평성대'의 종언 가능성은 특히나 요즘과 같이 어수선한 시국에서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도 만약 예전과 같이 투자등급에서 부도가 재발한다면 이는 그간 어렵사리 쌓아온 시장 신뢰가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점에서 신용평가사 입장에서도 여간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가 없다.

신용평가에서는 부도를 '원리금의 적기상환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업회생절차, 파산절차의 개시가 있는 경우'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국내에서 '공식부도'로 간주되고 있는 '협의의 부도' 개념이다. 여기에 워크아웃, 기촉법 등과 같이 채권자의 경제적 손실을 수반하는 채무 재조정(DDE: Distressed Debt Exchange)을 더한 개념이 '광의의 부도'다. 협의에 비해 광의의 부도가 부도의 실질에 보다 더 가깝고 글로벌 스탠다드에도 부합한다는 점에서 2015년 이후로는 국내에서도 금융투자협회 홈페이지 등을 통해 협의의 부도뿐 아니라 광의의 부도도 함께 공시되고 있다.

그런데, 국내 평가사 부도율에는 몇 가지 한계가 내포되어 있다. 일단, 부도율 작성 대상이 모든 신용평가 대상이 아닌, 무보증 '선순위사채'로만 국한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최근 부도 처리된 레고랜드 관련 ABCP가 부도율에 잡히지 않는 이유다. 또한, 과거 저축은행 사태로 부도처리된 관련 은행들의 당시 발행 사채가 모두 후순위사채였던 까닭에 이들 역시 부도율에 포함되지 않고 있다. 이처럼 현재 국내 평가사가 공시 중인 부도율에는 현실이 온전하게 반영되어 있지 못하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상대적으로 짧은 신용평가 역사 탓에 충분한 부도율 데이터가 축적되어 있지 않다는 점과 등급별 모수 부족에 따라 소수의 부도가 특정 등급의 부도율 급등을 야기하는 약점도 빼놓을 수 없다. 참고로 최근의 데이터를 기초로 한국기업평가 A급 3년 차 평균누적부도율을 글로벌 평가사들과 비교해보면, 협의의 부도율은 0.2%대로 그런대로 비슷하지만, 광의의 부도율은 그들보다 3배 정도 높은 수준을 나타내고 있음이 확인된다. 바로 아래 등급인 BBB급으로 가면 그 격차는 더욱 현격히 벌어진다.

국내에서 기업부도가 특히 부각된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대별되는데, 1997년의 외환위기, 2008년의 금융위기, 그리고 2010년대 초·중반에 걸쳐 나타난 경기침체기가 그것이다. 여기서 외환위기 시기를 제외하고 2008년의 금융위기와 2010년대 초·중반의 경기침체기를 살펴보면, 기업부도의 근저에 각각 '부동산금융'과 '시황급락'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전자는 주택전문 중견 건설사와 저축은행의 무더기 부실화를, 후자는 조선업과 해운업 등 시황산업 관련 대기업들의 동반 몰락을 초래하였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한 2020년 이후 최근까지는 사실상 부도가 전무했다. 부도는커녕 오히려 투자등급 중심으로 신용등급 상향우위 추세마저 나타났을 정도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저금리 기조'와 '과잉 유동성'이 결정적인 배경이 된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따지고 보면 경기는 이미 코로나 사태 이전인 2019년부터 하강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팬데믹 사태가 물줄기의 방향을 인위적으로 바꿨을 뿐 아니라 부동산을 비롯한 시장의 '판'까지 키운 셈이 되었다.

그간의 국내 부도사례들을 살펴보면 일반기업과 비교해 금융기관의 부도가 현저하게 적었던 점이 특징이다. 실제로 국내 평가사가 평가한 금융기관 전부를 통틀어 최근 20년간 공식부도로 집계된 금융기관은 전무하다. 이는 주로 일반기업과는 다른 금융기관의 특성에 기인하는데, 상대적으로 시스템 리스크로 번질 우려가 큰 까닭에 유사시의 정부 개입 강도가 일반기업들에 비해 훨씬 크다는 점이 주된 이유 중의 하나다. 금융기관의 경우 일단 부실화가 진행되면 부도 처리되기 이전에 P&A(자산부채이전) 방식 등을 통해 다른 금융기관에 인수되는 경우들이 많다는 점도 또 다른 요인으로 꼽힌다.

한국기업평가의 분석에 따르면 부도를 초래한 원인으로 크게 네 가지 요인 - 경영관리 위험, 무리한 사세확장, 연쇄부도, 판매부진 - 이 지목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경우 실적저하가 자금부담을 가중시켜 유동성 위험 확대로 이어진 점이 부실화 과정에서의 공통된 현상으로 관찰된다. 이는 실적저하는 어느 기업이나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일이지만, 유동성 위험만큼은 일정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버텨낼 수 있는 기업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글로벌 금융위기 등과 같은 극단적 상황이 전개되지 않는 이상 일시적 요인에 의해 기업 부실화가 전격적으로 진행될 가능성 역시 낮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당장 기업의 생사를 좌우하는 열쇠는 결국 펀더멘탈보다는 유동성이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과거의 사례들에 비추어 최근 전개되고 있는 국내 상황은 외환위기나 경기침체기 때보다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의 모습에 보다 가까워 보인다. 위기의 중심에 부동산이 있고, 긴축과 금리상승이 주요 트리거가 된 점에서 닮았다. 반면, 같은 금리인상이라 해도 지금이 속도와 폭 면에서 비할 수 없이 빠르고 가파른데다 신뢰의 위기마저 겹쳐 있는 점은 당시와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보통 경기침체가 기업부실을 야기하고, 이것이 다시 금융권 부실로 이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패턴이라면, 지금은 통상적인 패턴을 벗어나 급격한 금리인상 여파가 곧바로 금융기관 부실로 직결될 수도 있다는 관측마저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부동산 PF만 해도 과거에 비해 분산된 위험부담 행태 등을 고려하면 예전과 같이 특정 섹터가 무더기로 부실화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역대급 금리인상 사이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와중에, 그것도 극심한 돈맥경화 현상까지 맞물린 상황에서, 모두가 아무 탈 없이 지나가길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희망사항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간 코로나 극복을 명분으로 알게 모르게 처리를 미뤄온 우리 경제 내 부실요소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외부로부터 강요된 구조조정'은 일정부분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여겨진다.

최근 고조되고 있는 위기발생 가능성의 상당 부분이 부동산 문제와 얽혀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부동산 경기가 극적으로 살아나지 않는 이상 관련 기업들의 부도위험 역시 덩달아 높아질 수밖에 없을 공산이 크다. 물론, 익스포져 크기와 대출 변제순위, 사업장 위치와 종류 등에 따라 업체 간 유불리가 나눠질 수는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대형사라고 해서 마냥 안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업의 생사를 가르는 유동성 리스크는 규모의 대소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부동산의 경우 여타 재화와는 달리 V자 반등을 기대하기 어려운 특성을 지니고 있는 만큼 장기전을 각오해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래저래 당분간은 시간과의 싸움 속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함'을 입증하는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송태준 한국기업평가 IS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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