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유럽중앙은행(ECB)이 일본보다 금리를 더 낮춰 마이너스 금리라는 강력한 칼을 빼들었지만, 반응은 심드렁하다. '지금까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는데, 금리 더 낮춘다고 무슨 뾰쪽한 수가 나겠는가' 하는 정도다.

경기 회복에 '백약이 무효'인데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금리 정책만으로 더는 힘들 것이라는 예상도 많다. 유럽의 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자금을 예치하고 받는 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더라도 개인과 기업 대출이 늘지 못할 것이라는 회의론이 팽배하다. 또 중앙은행이 기업에 이전된 위험을 대신 책임져 주겠다고 공언한 격이지만, 기업과 개인들의 자금 수요가 없다는 점도 문제다.

그나마 초저금리를 통해 은행들의 자산 투자 확대와 그에 따른 자산 가격 상승, 신용 창출을 통한 '부의 효과', 이에 따른 소비 자극 정도의 노림수는 기대할만하다는 평가들이다.

어찌 됐든 유럽을 포함해 전 세계의 '돈'이 ECB의 마이너스 금리 정책에 어떻게 반응할지는 좀 더 관찰해야할 필요가 있다.

유럽의 초저금리는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 자산가들에게 현찰 보유 욕구를 부추길 것으로 보인다.

초저금리 시대에는 은행예금에 따른 이자수익보다 회피할 수 있는 세금규모가 더 크면 현찰 수요가 커지게 된다.

2000년 이후 세계적으로 현금통화, 즉 현찰 잔액이 꾸준히 증가하는 점은 이런 초저금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고액 현찰 비중이 증가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예컨대 미국은 100달러짜리 비율이 77%, 유럽은 50유로 이상 고액권 발행 비율이 90.4%에 달한다. 우리나라도 5만 원권이 5년 전 발행 첫해 28%에 불과했지만, 현재는 68%로 크게 늘었다. 도입 후 5년 동안 시중에 풀린 5만 원권이 43조 원, 전체 화폐 잔액 중 68%를 차지하며 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환수율은 48%에 그치고 있다.

시중에 고액 현찰 보유가 많이 늘어난 것은 국세청의 과세가 강화된 데다 금융소득종합과세 기준이 4천만 원에서 2천만 원으로 낮아졌고, 금융기관들의 금융정보분석원(FIU) 보고 기준이 강화되면서 자산가들이 금융거래 내역 노출을 원치않아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흐름은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적으로 안전자산 선호 경향이 강화되고 저금리로 화폐 보유성향이 높아진 것과 궤를 같이한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차떼기'에 사용된 사과상자에는 1만 원권으로 약 5억 원, 007가방에는 1억 원이 들어갔지만 5만 원권을 사용하면 사과상자에는 25억 원, 007가방에는 5억 원이 들어갈 수 있다. 보관과 운반이 쉽다는 이유로 개인들의 안방 장롱이나 기업 금고에 잠겨 지하경제에 악용될 수 있다는 염려도 그만큼 커진 셈이다.

일본의 초저금리와 유럽의 마이너스 금리, 우리나라의 저금리 장기화 기조는 모두 고액권 중심의 화폐 수요를 늘리고 있다. 이런 여건 속에서 우리 정부는 지하경제 양성화라는 어려운 국정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네발 달린 짐승인 '돈'은 가장 눈치가 빠르고 겁 많으며, 수익이 나는 곳이면 가장 빨리 냄새를 맡아 움직이는 살아있는 동물이다.

개각 이후 새로 꾸려질 경제팀은 이 짐승을 제대로 조심스럽게 다루어 건강한 투자와 소비로 연결되는 물꼬를 터주는 숙제를 풀어야할 것이다.

(취재본부장/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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