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외국인이 제일 먼저 배우는 한국어는 '빨리빨리'다. 한국인의 성격과 문화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다. 뭐든지 빨리해야 직성이 풀린다. 식당에 가면 음식이 빨리 나와야 하고, 직장에서 일은 밀리지 않게 빨리 처리해야 한다.

스페인은 반대다. 외국인이 첫 번째로 익히는 스페인어는 '마냐나(Manana)'다. 마냐나의 원래 뜻은 '내일(tomorrow)'이지만 '이따가', '나중에', 심지어 '먼 후에'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쉽게 말해 '지금은 아니다'는 얘기다.

마냐나에는 스페인의 독특한 문화가 담겼다. 뭐든지 뒤로 미루고 보는 스페인 사람의 성격이 투영돼 있다. 행정관청에 민원을 넣으러 가도, 배관공을 부르기 위해 전화를 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마냐나'다. 독촉이라도 하면 '마냐나 세구로(manana seguro.내일은 틀림없이)'라는 말이 돌아온다.

'마냐나' 문화를 알면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스페인의 구제금융 이슈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지난주 국제금융시장은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신청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로 갈팡질팡했다. 마냐나 관점에서 보면 (구제금융 신청을)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나중으로 미루고 싶은 게 스페인의 속내다.

만약 스페인이 구제금융을 신청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이번 주가 적기다. 8일 열리는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에서 구제금융을 받겠다는 뜻을 밝히면 된다. 18~19일에는 유럽연합(EU) 정상회의가 열린다. 이번 주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다음 주에 승인을 받으면 빈사상태에 빠진 금융시스템에 자금을 수혈할 수 있다.

그러나 스페인은 '마냐나'라는 말로 구제금융 신청을 연기할 것으로 예상된다.

구제금융 신청을 시간문제로 보고 있는 주변의 시각과 달리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는 당장 생각이 없다며 구제금융설을 차단하고 있다. 까다로운 구제금융 조건도 그렇고 선거를 앞둔 여러 가지 변수도 구제금융 신청을 머뭇거리게 한다.

스페인은 21일 자치주인 갈리시아와 바스크에서 지방선거를 치른다. 갈리시아는 라호이 총리의 고향이다. 정권 심판이 될지도 모르는 선거가 고향에서 치러지는데 나라가 망했다는 선언(구제금융 신청)을 하는 총리는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바스크는 틈만 나면 독립을 꿈꾸는 분리주의자들이다. 라호이 총리가 구제금융을 신청하면 '거봐, 내 그럴 줄 알았다. 얼른 독립해야지'라는 여론이 형성될 것이다.

다음 달 25일에는 카탈루냐 총선이 예정돼 있다. 카탈루냐는 이번 총선에서 스페인에서 분리 독립하는 안건을 놓고 찬반 투표를 한다.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는 스페인 경제의 알맹이 역할을 하는 자치주다. 카탈루냐의 불만은 '우리도 먹고살기 빠듯한데 왜 피 같은 우리 돈으로 가난한 자치주를 도와야 하나'는 것이다. 각 지방의 자치를 인정하면서도 재정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있는 곳간에서 없는 곳간을 채우는 식으로 재정을 운영하다 보니 생긴 불만이다.

라호이 총리는 이 모든 정치변수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온 후에 스페인의 구제금융 문제를 다루고 싶을 것이다. 스페인 관리들은 다가올 유로존 재무장관 회의나 EU 정상회의에서 이렇게 속삭일지도 모른다.

'마냐나 세구로' (국제경제부장)

jang73@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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