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오른편에 놓인 TV 화면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예상치 못했던 이 회장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화면을 쳐다보고 있던 기자들이 흠칫 놀랐다.
이날 오전 10시에 시작해 11시50분께 휴정한 재판은 오후 2시 재개될 예정이었다. 그때까진 아직 20분가량 남은 상황.이 회장은 당연히 막판까지 변호인단과 시간을 보내다 정시에 입장할 걸로 예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 회장은 아무도 없는 법정에 혼자 먼저 들어와 오후 재판을 준비했다.
잠시 여유 시간도 가졌다. 법원 직원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오전 내내 굳어있던 표정을 잠시 풀었다. 목이 타는 듯 물을 몇 번 마셨고, 눈이 건조한 지 안약도 두어 차례 넣었다.
이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던 건 이날이 검찰의 구형과 이 회장의 최후 진술이 있는 결심 공판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2부(박정제 지귀연 박정길 부장판사)는 이날 이 회장 등의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 결심 공판을 진행했다. 2020년 9월 검찰의 기소 이래 106번째 공판기일이다.
전 국민의 관심이 높고 취재 열기도 뜨거워 법원 측에서 본법정 인근에 중계법정을 따로 마련했다. 통상 사람이 많이 몰릴 것으로 예상될 때 해주는 것이다. 이에 화면을 통해 법정 안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다만 음성은 마이크를 켜고 말하는 경우에만 공유됐다.
이 회장은 법정 안 모습이 중계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 보였다. 자연스럽게 쓰레기통으로 걸어가 다 쓴 안약을 버렸고 립밤도 꺼내 발랐다. 법원 직원과 대화를 나눌 땐 방청석에 잠시 엉덩이를 붙이기도 했다.
짧은 휴식이 끝나고 재판장과 부장판사들, 검사들, 피고 측 대리인들이 모두 입장했다. 이 회장은 변호인단과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았다. 오후 재판이 속개됐고, 변호인단의 최종 변론이 4시간 넘게 이어졌다.
이 회장은 오후 내내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유지했다. 덤덤하게 정면을 응시할 뿐 좀처럼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움직임도 거의 없었다. 간혹 두 손을 모으거나 마른세수를 하듯 목을 훑는 게 전부였다. 잠시 턱을 괴거나 이마를 짚었다가도 금세 자세를 바로 고쳤다. 오후 4시 반에 휴정했을 때도 잠시 법정 밖으로 나갔다 금방 복귀했다.
이날 이 회장은 오전 2시간과 오후 4시간 반, 총 6시간 반이 넘도록 가만히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저녁 6시40분이 넘어서야 최후 진술을 위해 입을 뗐다. 최후 진술 직전 자리 정돈을 위해 잠시 휴정했을 땐 긴장한 듯 물을 마셨고, 불편했는지 의자도 한번 교체했다.
준비해 온 종이 세 장을 꺼냈다. 차분하게 읽어 내려갔지만 중간중간 목이 메는 듯 말을 더듬었다. 부친 이건희 선대회장이 삼성을 글로벌 기업으로 키웠다는 내용과 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는 부분을 읽을 때는 목소리가 더욱 떨렸다.
이날 이 회장은 '긴 하루'를 보냈다. 오전 9시40분에 도착한 법원을 오후 8시가 돼서야 나설 수 있었다.
근데 이게 이날 하루가 아니었다. 2020년 9월 검찰의 기소로 시작된 이번 재판은 3년 2개월, 106회 공판기일을 거쳐서야 가까스로 마무리 수순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 삼성은 이렇다 할 대형 인수합병(M&A) 하나조차 하지 못했다. 불확실한 경영환경으로 모든 기업이 눈에 불을 켜고 미래 먹거리를 찾는 상황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하고 있고, 우리나라는 그 한가운데 위치한다"며 "생성형AI 기술이 전 세계 사업에 영향을 끼치는 등 상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기술혁신 이뤄지고 있다"는 이 회장의 말을 허투루 들을 일이 아니다.
이르면 내년 초 1심 판결이 나오겠지만, '끝'이 언제인 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날 검찰은 이 회장이 범행을 부인하고 있고,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 실질적인 이익이 귀속됐다며 징역 5년에 벌금 5억원을 구형했다. (기업금융부 유수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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