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파 갈등 다시 수면 위로…진흙탕 싸움 우려
은행 경쟁력 갉아먹는다 지적에도 갈등 봉합 묘연

(서울=연합인포맥스) 이현정 기자 = 손태승 우리금융 회장이 연임 도전을 포기하고 용퇴하기로 결정한 가운데 차기 회장에 도전하는 내부 출신 후보군의 난립으로 차기 회장 후보를 추천하는 임원추천위원회가 시작부터 과열 양상으로 흐르고 있다.

상업·한일은행 출신으로 구분되는 계파 간 분란이 다시 표면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데다, 고질적인 '정치화' 현상마저 나타나면서 자칫 내부 출신 간 진흙탕 싸움으로 번져 우리금융 지배구조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문제는 우리금융의 리더십 위기 상황이 단순히 손 회장의 라임펀드 중징계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금융권에서는 손 회장의 용퇴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금융 이사회가 투명한 지배구조를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후임자를 선임하는 것이 '내치(內治)'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보고 있다.

◇이전투구식 경쟁 격화…"조직 분열 우려"

19일 금융권에 따르면 우리금융 임추위는 손 회장을 제외한 차기 회장 1차 후보(롱리스트)로 10명 내외를 선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여기에는 자회사 대표, 지주 및 은행 일부 임원, 해외 법인장 등 내부 출신 후보 약 20여 명과 외부 후보 10명과 함께 평가 대상에 올랐다.

외부 후보에는 전직 우리금융 임원들이 포함돼 있어 사실상 우리금융 출신 전·현직 임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이미 지난해 11월 금융위원회가 손 회장에 대한 라임펀드 불완전 판매 관련 중징계 처분을 내린 직후부터 향후 임추위를 염두에 둔 차기 레이스를 시작했다.

현직 임원은 물론이고, 임기를 마치고 뒤로 물러나 있던 전직 최고경영자(CEO)를 포함한 올드보이(OB) 십수 명이 한일·상업 출신별 라인을 형성해 '나도 뛰고 있다'며 유력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후보들 간 약점과 비난 내용을 담은 소위 마타도어성 찌라시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등 흑색 선전이 난무했다.

일부 후보는 '손 회장과 이원덕 행장 모두 한일은행 출신이니 차기 회장은 상업 출신이 선임될 차례'라고 노골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현 정권 핵심 인물에 줄을 대고 있다거나 사외이사들을 찾아가 충성을 맹세했다는 등 이른바 '정치금융'도 다시 성행하는 분위기다.

'A 후보가 B보다 더 센 줄을 잡았다더라', '갑자기 이름이 거론되는 C는 정치적 뒷배경이 이렇다더라', 'D는 어느 의원 라인에 섰다'는 등 확인되지 않은각종 설(說)이 들끓고 있고, 노골적으로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

2017년 채용 비리 사태 이후 공정한 인사시스템 구축, 과점주주 체제 도입, 민영화 등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지난 수년 간의 노력이 한 순간에 수포가 된 순간이다.

한 우리은행 관계자는 "해묵은 유물로 여겨지던 상업-한일 간 갈등까지 다시 회자될지는 정말 몰랐다"면서 "조직의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면서까지 상대방을 비방하는 것도 모자라 조직을 쇄신할 적임자가 본인이라고 주장하는 선배들을 보면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럽다"고 말했다.

◇20년 넘게 '라인 경쟁'…은행 경쟁력 갉아먹어

금융권 안팎에서는 우리은행의 고질적인 내부 갈등이 지금의 위기에 몰아넣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은행은 지난 1998년 외환위기 당시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정된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합병하면서 탄생했다.

대형 은행이 작은 은행을 삼킨 흡수합병이 아니라 비슷한 은행끼리 대등합병을 했기에 태생부터 채널 갈등의 불씨를 갖고 있었다.

우리은행은 2008년부터 한일은행과 상업은행 출신이 번갈아 행장을 맡고, 임원도 양쪽 출신을 거의 같은 비율로 구성하는 등 갈등을 줄이기 위해 애를 써왔다.

하지만 이순우·이광구 등 상업은행 출신이 연달아 행장에 오르고 한일은행 출신이 맡을 것으로 예상됐던 수석부행장 자리마저 없애 버리면서 한일 측 인사들의 불만이 커졌다.

파벌 다툼은 채용 비리 사태 폭로전을 불러왔다.

2017년 이광구 전 행장이 중도하차할 당시 표면적으로는 채용 비리가 이유였지만 이면을 들춰보면 계파 갈등에서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은행장 등 핵심 주요 보직을 상업은행 출신이 장악하고 있는데 불만을 품은 한일은행 출신 전직 임원이 이를 의원실에 폭로하면서 불거졌기 때문이다.

이 전 행장의 중도하차로 정부의 우리은행 잔여지분 매각도 중단된 탓에 결과적으로 한일-상업 간 채널 싸움은 우리은행 민영화에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이 전 행장 후임으로 한일 출신 손 회장이 선임됐지만 이러한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손 회장은 취임 때부터 '파벌 종식'을 선언하고 실력과 성과로 인정받는 조직문화를 만들겠다며 탕평 인사를 시도했음에도 갈등은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오히려 손 회장과 같은 한일 출신 이원덕 행장이 선임되면서 이번엔 반대로 상업 출신 인사들이 소외당했다며 불만을 터트렸다.

손 회장이 지난해 사장직을 신설해 상업 출신 박화재 사장을 선임했지만, 오히려 출신 간 균열을 더 키우고 과거로 회귀시켰다는 말도 나왔다.

합병 이후 입사한 부장급 이하 직원이 80~90%에 달하는 상황에서 낡은 파벌 싸움을 지속하느라 은행의 경쟁력을 갉아 먹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다른 은행도 과거 채널간 갈등이 있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거의 사라졌으며, 글로벌 은행을 지향하는 시대에 파벌이 웬 말이냐"면서 "계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물이 회장에 선임될 경우 똑같은 문제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hjlee@yna.co.kr
(끝)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에서 13시 20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