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이미란 기자 = 14일 별세한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은 25년간 총수로 재직하면서 그룹 외형을 1천150배나 성장시키는 큰 족적을 남기며 현재의 '글로벌 LG'의 기틀을 마련했다.

재임 기간 70여 개 연구소를 설립해 기술 수준을 고도화하고, 19인치 컬러 TV와 공냉식 에어컨, 전자식 VCR, 슬림형 냉장고 등을 국내에 최초로 선보인 것도 그다.

민간기업 최초로 락희화학(현 LG화학)을 기업공개(IPO)하며 투명경영에 앞장섰고, 전문경영인 중심의 '자율경영' 체제도 도입했다.

구 회장은 만 70세가 되던 1995년 스스로 물러난 후부터는 활발한 공익활동에 전념했다.

경영에 관여하지 않으며 자연을 벗삼은 간소한 '자연인'의 삶 등 경영인 인생의 모범을 보여준 재계의 큰 어른으로 꼽힌다.

구 회장은 구인회 LG 창업주의 장남으로 1925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LG그룹 창업 초기인 1950년 스물 다섯의 나이에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명예회장으로 경영일선에서 은퇴할 때까지 45년간 기업 경영에 참여했다.

진주사범학교를 마친 후 교직을 천직으로 생각하며 교사로 근무했지만 부친이 1947년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을 설립해 럭키크림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후 사업이 날로 번창해 일손이 모자라자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부친의 사업을 도우며 지냈다.

그러던 중 아예 회사에 들어와 사업을 도우라는 부친의 부름에 1950년 교편을 놓고 본격적으로 기업인으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고인은 십 수년 공장 생활을 하며 '공장 지킴이'로 불릴 만큼 현장 수련을 오래 했다.

이에 주변에서 "장남에게 너무한 거 아니냐"고 하자 구인회 회장은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 자루 만드는 데도 수 없는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한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다"며 현장 수업을 고집했다.

실제로 이때 락희화학에서의 플라스틱 가공 경험은 훗날 금성사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플라스틱 가공에 필수적인 자체 금형 기술 확보와 인력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때 축적된 금형 역량을 바탕으로 라디오, 선풍기, 모터 등 당시로서는 높은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전자제품의 금형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고인은 이후 구인회 회장이 1969년 타계한 후 1970년 45세 나이로 LG그룹 2대 회장에 취임했다.

특히 '기술입국'(技術立國)의 일념으로 화학과 전자 분야의 연구개발에 열정을 쏟아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이를 통해 수많은 국내 최초 기술과 제품을 개발해 LG의 도약과 우리나라의 산업 고도화를 이끌었다.

구 명예회장은 "우리나라가 부강해지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하여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 명예회장은 은퇴를 석 달여 앞둔 1994년 11월 나흘에 걸쳐 전국 각지에 위치한 LG그룹 소속의 연구소 19개소를 일일이 찾아 둘러 봤다.

훗날 그때 심정을 '마음이 흐뭇함으로 가득 찼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구 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다.

화학분야에서는 1970년대 울산에 하이타이(가루비누), 화장비누, PVC(폴리염화비닐)파이프, DOP(프탈산디옥틸), 솔비톨 등 8개의 공장을 잇달아 건설하면서부터 종합 화학회사로의 발돋움을 본격화했다.

또 전남 여천 석유화학단지에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PVC레진, ABS(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 납사(나프타) 분해공장 등을 구축해 정유(당시 호남정유)부터 석유화학 기초유분 및 합성수지까지 석유화학 분야의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1970년대에는 잇따른 기업공개로 우리나라 초기 자본시장에 활력을 불어 넣고, 민간 기업의 투명경영을 선도했다.

당시만 해도 기업공개를 기업을 팔아 넘기는 것으로 오해해 이를 우려하는 분위기였고, 일부 임원들은 기업공개를 강력히 반대했다.

국내 민간 기업에서는 이제까지 기업공개를 한 사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구 회장의 의지에 따라 1970년 2월 그룹의 모체 기업인 락희화학이 민간 기업으로서는 국내 최초로 증권거래소에 상장했고, 전자 업계 최초로 금성사가 기업공개를 하면서 주력 기업을 모두 공개한 한국 최초의 그룹이 됐다.

구 회장은 1987년 2월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에 취임해 민주화 진전에 따른 전환기에 재계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데 앞장서기도 했다.

고인은 취임기자회견을 통해 "전경련이 시대적 상황에 맞춰 새로운 발전이 요청되는 이때, 분에 넘치는 중책이긴 하나 징검다리가 되어 최선을 다하겠다"고 천명했다.

이후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을 통합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전경련 산하에 '경제사회개발원'을 설립하고, '국민 속의 기업인, 국민경제를 위한 기업'을 모토로 기업 이미지 개선 활동을 전개했다.

구 회장은 1988년 21세기 세계 초우량기업으로 도약을 목표로 한「21세기를 향한 경영구상」이라는 변혁방향을 발표했다.

이는 사업전략에서 조직구조, 경영스타일, 기업문화에 이르기까지 그룹의 전면적인 경영혁신을 담은 것이었다.

특히 회장 1인의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관행화 된 경영체제를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선진화된 경영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자율과 책임경영'을 절대절명의 원칙으로 내세웠다.







1995년 2월에는 70세의 나이로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같은 결정을 내린 것은 경영혁신의 일환으로 경영진의 세대교체가 필요하다고 결심한 데 따른 것이었다.

구 명예회장이 회장에서 물러날 때 창업 때부터 그룹 발전에 공헌을 해 온 허준구 LG전선 회장, 구태회 고문, 구평회 LG상사 회장, 허신구 LG석유화학 회장, 구두회 호남정유에너지 회장 등 창업세대 원로 회장단도 젊은 경영인들이 소신 있게 경영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동반퇴진을 단행했다.

구 명예회장이 25년 간 회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LG그룹은 매출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천150배 성장했다.

임직원 수도 2만명에서 10만명으로 증가했다.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문은 부품소재 사업까지 영역을 확대해 원천 기술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수직계열화를 이루며 지금과 같은 LG그룹의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됐다.

고인은 이후 24년간 자연인으로서 소탈한 삶을 보냈다.

다양한 분야의 공익사업에 공을 들였지만, 인재를 육성하는 교육 분야에 관해서는 각별한 열의를 쏟았다.

그는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의존할 것은 오직 사람의 경쟁력 뿐"이라는 말을 늘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구 명예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한 가지 결심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구인회 창업회장이 생전에 강조한 '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라는 말이었다.

대신 그는 충남 천안시 성환에 위치한 연암대학교의 농장에 머물면서 은퇴 이후 버섯연구를 비롯해 자연과 어우러진 취미 활동에 열성을 쏟으며 하루하루 바쁜 일정을 보냈다.

인재 양성을 위한 공익활동에 헌신하는 열정으로 충만한 여생을 보낸 데 따라 내경영자로의 업적은 물론 은퇴 후의 삶까지 재계의 귀감이 됐다.

mr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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