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전 가상자산 업계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다. 2년 넘게 진행된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와 리플(구 리플랩스) 간의 증권법 위반 소송에 대한 뉴욕 남부지방법원의 약식판결이 발표된 것이다. 그 내막은 일반인들에게 조금 복잡할 수 있으나 이 신생 기술의 대중화에 관심이 있다면 절대 놓쳐서는 안 될 사안이다. 공식적인 판결의 요점은 리플이 증권법을 일부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리플이 리플 블록체인의 고유 자산인 XRP를 기관투자자에게 매각한 행위는 증권법 위반이고 개인투자자에게 매각한 행위는 위반이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시장은 이를 호재로 받아들였다. 발표 직후 해당 가상자산인 XRP 가격은 한때 90%까지 급등하였고 다른 일부 알트코인도 동반 상승하였다. 나스닥 상장사인 코인베이스의 주식도 30% 상승하였다.

피고인의 일부 범법 행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시장이 호재로 받아들인 이유는 따로 있다. 시장의 최대 관심사는 승소 여부보다는 XRP라는 가상자산 자체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었으며 이에 대해 법원이 XRP는 증권이 아님을 판결문에 언급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아직 이 부분에서 혼란을 느낀다. 리플이 일부 증권법을 위반했는데 관련 자산인 XRP가 어떻게 증권이 아니라는 것일까. 이를 이해하려면 미국 증권법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1933년에 제정된 미국 증권법(Securities Act of 1933)은 증권을 계약 관계에 기반한 권리로 정의하고 이를 정형적 증권과 비정형적 증권으로 구분한다. 정형적 증권은 쉽게 말하면 일정한 모양새를 갖춰 증권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발행 절차가 법규화 되어 있는 주식, 국채, 사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발행자에 대한 투자자의 권리를 명시한 계약서다. 예를 들어 주식은 발행사의 지분, 경영권, 배당에 대한 권리이며 사채·국채는 발행사로부터 만기 시 원금과 이자를 받을 권리다. 당연하게도 1933년에 가상자산의 등장을 예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일정 모양새'에 가상자산은 포함되지 않는다. 비정형적 증권은 명시적 계약 없이 묵시적 계약이 존재하는 경우다. 공식적인 계약서는 없지만 정황상 특정 권리를 보유한 채권자와 이 권리 이행에 응할 의무가 있는 채무자가 있고 그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가 4가지 조건(금전적 투자, 공동 사업체, 이익 기대, 제3자의 노력)을 만족시키면 일명 '투자계약'이 묵시적으로 존재하며 증권이 발행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투자계약이 채권자와 채무자 간의 약속을 가리키는 것이지 그 약속 내용을 구성하는 자산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거 미국 사법부는 오렌지, 위스키, 부동산 등 다양한 자산이 연루된 채무자와 채권자 간의 약속을 투자계약이라고 판결해왔다. 투자계약의 존재 여부를 따질 때 연루된 자산의 법적 지위는 중요하지 않다.

이번 판결은 이러한 법리에 충실하다. 리플이 증권법을 위반했는지 판단할 때 XRP 자체에 대한 증권성 평가는 불필요하다. XRP는 채무자에게 행사할 수 있는 채권자의 권리를 명시한 계약이 아니라 그저 코드일 뿐이다. 따라서 리플과 투자자 간의 투자계약 존재 여부는 XRP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리플이 XRP를 투자자들에게 매각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되는 쌍방 간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법원은 투자자에게 제3자의 노력에 의한 수익을 약속하며 XRP를 직접 매각한 행위에 대해서는 투자계약이 성립된다고 판단했다. 반면 매도자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는 거래소를 통한 일명 '프로그래매틱 매각 방식'은 투자계약의 성립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증권법 위반이 없었다고 봤다. 중요한 건 투자자가 기관이나 개인이냐가 아니다. 투자자들이 공동 사업체에 투자하고 제3자의 노력에 의한 수익을 기대했는지가 결정 요인이며 매각 대상이 우연찮게 기관과 개인으로 나뉘어졌을 뿐이다.

가상자산의 증권성 논쟁을 자산 위주로 생각해 온 이들은 이번 판결을 쉽게 못 받아들이는 듯하다. 주식이나 채권은 자산 자체가 증권인데 가상자산은 자산 자체에 대한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의아해한다. 차이점은 위에서 언급했듯 주식이나 채권은 계약서임과 동시에 법이 정형화한 증권으로 명시한다는 점이다. 반면 가상자산은 계약서가 아니며 현행법이 명시한 정형화 증권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또 하나의 증권 부류인 비정형적 증권은 투자계약이 성립될 때 존재하며 이는 연루된 자산이 아니라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일부에서는 결과적으로 개인 투자자들이 참여한 프로그래매틱 매각에 증권법 위반이 적용되지 않아 투자자 보호를 받지 못하는 모습이 된 것을 근거로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삼권분립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의 발상이다. 개인투자자들이 투자자 보호의 우선 대상인 것은 맞지만 그것은 사법부의 의무가 아니다. 사법부의 의무는 입법부가 만든 법을 철저히 법리에 따라 실제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다. 법리에 따른 법 적용이 개인 투자자 보호에 미흡한 결과를 낳았다면 이는 사법부의 판결이 아니라 입법 과정을 통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런 면에서 이번 판결은 가상자산 시장의 투자자 보호가 정치적 명분으로 이용당하지 않고 제대로 실행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것은 바로 낡은 증권법의 틀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는 행정기관의 월권행위가 아닌, 국민이 선출한 입법 기관이 가상자산의 속성을 반영하여 새롭게 제정한 법을 적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점이다.

리플 소송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SEC가 주장하는 혐의 중 일부는 공판으로 넘어갈 예정이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SEC가 항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가상자산 업계가 그토록 원했던 가상자산 자체의 법적 지위에 관한 불확실성을 금융 관련 소송 경험치가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는 뉴욕 남부지방법원이 상당 부분 해소했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다. 나아가 이번 판결은 현행법의 한계가 드러나는 계기가 되어 지지부진한 미국 의회의 가상자산 관련 입법 과정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으로부터 방향성을 모색하는 국내 규제당국의 성향을 고려할 때 이는 한국 가상자산 업계에도 큰 호재임이 분명하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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