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들어 가계대출에 관한 전망이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오락가락했다. 초반에는 가계대출 잔액이 금융감독당국의 연간 목표치에 근접해서 곧 대출한파가 올 것이라는 공포감이 지배했다. 공포감은 곧 "대출 증가율 목표 6%의 근거가 뭐냐"는 반발과 불평이 반전했다가 "전세대출 중단 없다"는 고승범 금융위원장의 후퇴(?)로 수습되었다. 그러나 26일 발표된 금융위의 '가계부채 관리방안'의 핵심은 제2금융권까지 개인별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규제를 강화하는 것이다. 한국은행의 금융기관 대출서베이에서도 4분기 금융기관들은 자발적으로 대출창구를 옥죌 것으로 보인다.

정책당국이 연간 증가율 목표를 정하고 대출창구를 옥죄는 모습은 외환위기 이전에는 흔했다. 지금보다 훨씬 투박했다. 금융통화운영위원회(현재의 금융통화위원회와 금융위원회가 분리되기 전의 모습)가 연간 통화증가율 목표치를 정하면, 한국은행 실무진이 그것을 매월 점검하고 옥죄었다. 그래서 영농자금 수요가 몰리는 4~5월에는 대출이 중단됐다가 6~7월에 이르러 대출에 숨통이 트이곤 했다. 지금 가계대출 창구의 혼란스러운 모습은 25년 전의 데자뷰다.

지금 상황을 금융의 후퇴라고만 비판할 수 없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 물결이 퇴조하고 전 세계적으로 금융규제의 강도가 높아졌다. 거시건전성을 위해서라면 대출과 투자를 얼마든지 제한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왜 진작부터 가계부채를 관리해서 그 충격을 줄이지 않았느냐"는 수요자들의 볼멘소리도 일리가 있다. 그 만시지탄의 책임은 금융위원회뿐 아니라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에게도 있다. 기획재정부는 거시건전성 유지를 위해서 관계기관들과 협의체를 운영하고 있다. 가계부채는 그 협의체의 중요한 논의대상이다.

한국은행은 국회로부터 더 큰 칼을 부여받았다. 상업은행을 상대로 대출의 최장기한과 담보의 종류를 제한하거나 대출과 투자의 최고한도를 제한하고, 나아가 모든 대출에 대해 사전 승인하는 것이다. 이런 엄청난 수단이 있는데도 여태껏 가계대출 억제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에 대해서 한국은행에도 그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얼마 전 금융위원장이 교체된 뒤 가계부채 관리에 급발진이 걸렸다. 우리나라의 거시건전성정책은 속인주의라는 증거다. 거시건전성정책의 주도권을 두고 관계기관들끼리 밥그릇 싸움을 하던, 10년 전의 속지주의와는 딴판이다. 속지주의건 속인주의건 수장이 바뀌는 것과 상관없이 통계를 근거로 일관성 있게 접근하는 선진국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한국의 거시건전성정책은 후진적이다.

그럼에도 전세대출자금을 지속 공급키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일부에서는 "가계대출 증가의 주범이 전세대출이므로 그걸 빼면 맹탕"이라고 비판하지만 목표를 달성하는 데 초점을 맞춰 국민들이 낭패 보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정책당국의 횡포다. 외환위기 이전 한국은행이 국민들에게 욕을 먹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실행방식이다. 어떤 규제든 규제를 받는 측은 그것을 피하려고 한다. 그 과정에서 효과는 줄어들고 부작용은 커진다. 그러므로 규제를 할 때는 핀셋을 집어 들고 현실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누가 왜 가계대출이 필요한지 확인하고 그 자금흐름을 추적해야 한다. 신용카드사가 좋은 예다. 신용카드사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했는지 파악한 뒤에야 신용을 제공한다.

최근 기본소득당 용혜인 의원이 신선한 지적을 했다. 저리의 한국은행 중소기업지원 정책자금을 받은 상업은행들이 높은 금리로 '이자 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이 핀셋을 집어 들고 현실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려는 자세를 가졌다면, 즉 정책자금을 지원할 때 자금 용도와 돈의 흐름을 철저히 추적했다면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은행과 상업은행은 대출할 때 우선 담보자격을 보고 그다음 담보물의 가치를 챙긴다. 그러다 보니 중기청을 비롯한 제3의 기관이 남발하는 각종 자격증과 확인증이 대출의 전제조건이 되고, 금융기관 대출창구는 '스팩 경쟁의 장'으로 변질되었다. 유망 중소기업 자격증을 가진 지방 상공인이 수도권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아 비트코인을 사더라도 그 대출은 '지방 유망 중소기업 대출실적'으로 분류되는 것이 현실이다.

돈을 풀건 규제를 하건 정책이 효과를 보려면 추적과 확인이 필수적이다. 자격과 조건만 보고 건성으로 정책을 펴면 실패하기 쉽다. 가계대출에서는 실수요 여부를, 정책자금 공급에서는 자금의 집행과정을 확인해야 한다. 돈에 꼬리표를 달라는 말이다. 귀찮고 성가시더라도 일일이 확인하는 것이 은행 업무의 시작이다. 적당히 두부 자르듯 자금을 배분하는 것으로 끝나는 행정사무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차현진 한국은행 자문역)

※'노미스마(nomisma)'는 그리스어로 화폐와 명령(법)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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