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가상자산 산업을 대표하는 두 대형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와 바이낸스를 증권법 위반으로 기소하였다. 두 고소장은 방대하며 언급된 기소 내용도 다소 차이가 있으나 중심이 되는 내용은 같다. 두 거래소 모두 등록 없이 거래소, 증권사, 청산 대행사 역할을 했으며 이는 미국 증권법 위반이라는 것이다. SEC는 두 거래소가 지원하는 수백 개의 가상자산 중 19개 자산이 증권이라고 주장한다.

현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SEC는 기존의 법률 체계로 가상자산 산업을 합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기존 법규만으로 가상자산의 증권 여부를 명확하게 판별할 수 있어 증권법에 따라 투자자 보호가 가능하며 따라서 새로운 법규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법규는 명백한데 가상자산 업체들이 이를 준수하지 않기 때문에 투자자들의 피해가 발생한다는 주장이다. 이번 기소도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며 19개 자산을 자체적으로 증권이라 판단하고 SEC의 관할권이라고 해석하였다.

SEC의 이러한 접근 방식은 미국인 입장에서 보면 문제점이 많다. 가상자산이 증권이냐 아니냐의 논쟁까지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일단 기존 법률체계만으로도 가상자산 업계를 합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폐가 있다. 현재 미국 의회에는 기존 법규의 공백을 메우고자 계류 중인 가상자산 관련 신규 법안만 거의 20개에 달한다. 대부분의 법안들은 양당 의원이 공동 작성한 초당적 법안들이다. 국민이 선출한 의회가 가상자산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입법 절차를 진행 중이라는 것 자체가 규제 공백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법을 대행하는 행정기관인 SEC는 이처럼 명백한 현실은 무시하고 현재 법규가 충분하다고 주장하며 증권법을 확대 해석하여 소송을 일으키고 있다. 뉴욕주 민주당 의원 리치 토레스는 이를 두고 '의회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라고까지 표현했다.

SEC의 정책이 미국 내에서 가상자산 사업체들이 사실상 발붙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이는 최근 SEC의 행적을 보면 부정하기 어렵다. 코인베이스를 포함한 많은 업체들이 SEC와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법 준수를 위한 노력을 해왔음에도 불구 SEC는 신기술을 포용하는 법규 개정보다는 기존 법규를 고수하며 결국 소송을 선택했다. 주식 트레이딩 앱 회사인 로빈후드도 디지털자산 중개인 승인을 신청했으나 1년 반의 노력 끝에 결국 포기하였다. 결정적으로 게리 겐슬러 SEC 의장은 대중매체를 통해 디지털 화폐가 필요 없다고까지 발언하였다. SEC가 현재 가상자산에 대해서 보여주는 경직된 모습은 2000년대 초 보여준 유연성과는 정반대이다. 당시 유동화증권이 새로운 자산군으로 성장하자 SEC는 이를 포용하기 위해 유동화증권의 특성에 맞게 공시를 의무화한 'Regulation AB'라는 새로운 시행령을 만들었다. 현재의 유례없는 경직성은 공익을 우선시해야 할 SEC의 숨은 의도를 의심케 하는 부분이며 뱅커 출신인 겐슬러 의장이 월가의 이권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혹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국내 가상자산 산업의 규제는 어떻게 진행되어야 할까. 우선 SEC의 의견이 미국 정부의 의견을 대변하지 않을뿐더러 미국의 법을 뜻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 의회에는 건전한 가상자산 산업의 발전을 돕는 합리적인 규제를 만들려는 의원들도 다수 포진되어 있다. 미국 법원은 과거에 판결을 통해 투자계약은 발행 시장에만 존재하고 투자계약을 구성하는 자산 자체의 증권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코인베이스와 바이낸스 모두 이를 인지하고 있으며 법정 투쟁 의지를 확고히 하였다. 심지어 SEC 내부에도 겐슬러 의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다. 헤스터 퍼스 SEC 의원은 공개적으로 겐슬러 의장의 의견에 반대해왔고 이는 SEC 홈페이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 모두 현재 겐슬러 의장의 반대파들이 다수 존재하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이 벤치마킹해야 할 대상을 미국으로 국한 지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 가상자산 기술의 유용함과 잠재력을 잘 이해하는 관료가 포진한 관할권에서는 규제 불확실성을 제거하며 가상자산 사업체들을 유치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열린 자본 시장의 원칙에 따라 성장한 홍콩, 싱가포르, 두바이와 같은 금융 허브들은 가상자산 기술의 근간인 마찰 없는 가치 교환 네트워크의 혜택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이를 수용하고 발전시키려 하고 있다. 특히 유럽연합(EU)의 접근 방식은 우리에게 미국을 대하는 좋은 모범 사례가 된다. EU의 전통 금융자산 규제의 기본법인 MiFID(Markets in Financial Instruments Directive)의 틀을 참조하여 만든 MiCA(Markets in Crypto Assets)는 EU 내 가상자산 규제를 위한 기본법이다. 가상자산이라는 신생 자산군의 특징을 고려하지 않은 낡은 전통 금융 자산 규제의 틀에 억지로 끼워맞추려하지 않고 신기술의 특징을 반영한 새로운 기본법을 만들어 규제 불확실성을 제거하려는 목적의 법령이다. 가상자산 발행자들에게 블록체인 개발 과정에 적합한 공시의무를 부과하여 투자자를 보호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으며 올여름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우리가 흔히 사례로 참고하는 미국이 뚜렷한 방향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현재 상황은 안타깝다. 하지만 중요한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는 가상자산 분야에서는 맹목적으로 미국 정책을 벤치마킹하기보다는 냉철하게 국익을 따진 후 행동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미국에서는 현재 일부 정치 세력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해 가상자산 관련 규제 환경에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가상자산 규제에 대한 프레임 싸움이 한창이다. 정치적 고려를 앞세운 프레임은 혼란을 야기하고 공익의 극대화라는 규제 본연의 목적을 방해한다. 더욱 큰 그림을 보고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책과 규제를 만들 것을 다짐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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