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재주가 없어 기고의뢰에 섣불리 답을 못하고 시간을 끌었다. 하지만 금융시장에서 같이 동고동락했던 동료들과 지금 시장을 이끄는 많은 후배, 그리고 독자들과 함께 나의 짧은 시각을 나누며 긴장 속의 여유와 사유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면서 용기 있게 기고를 시작하게 됐다.

'오티움(Otium)'은 ①여유, 한가, 빈둥거림 ②능동적 여가활동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라틴어다. 철학적 의미로는 1번의 뜻으로 쓰이지만(마음 비움), 정신의학적 용어로는 활동 그 자체가 기쁨을 주는 그 무엇(여가활동)이라고 한다. 이 두 가지 뜻이 과정보다는 결과가 더 중시되는 첨예한 금융시장 종사자들에게도 위안을 주는 말이 아닐까 싶다. 투자 내지 딜링이라는 것이 때로는 여유를 가지고 한 발자국 떨어져 빈둥거리며 시장을 관조하고 때로는 리스크 테이커(risk-taker)로서 자발적인 심쿵한 재미로 '절겨야('즐겨야'의 경상도식 발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가지는 시각의 한계가 이제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보지 못하고 추상적인 숲만 보는 관찰자이자 방관자이기에, 독자들에게 부담스럽지 않을까 하는 걱정 또한 앞선다.

요즘의 금융시장을 생각하면 분명 나무들이 불타고 있는데 숲 깊숙이 있어서 연기가 잘 안 보이는 듯한 상황이다. 금융시장의 급격한 변동성과 혼란이 재앙적인 규모로 커질 수 있는 산불의 시작일지 아니면 연기만 나고 진화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다.

과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이 블랙스완의 출현이었다면 현재의 상황은 인위적으로 열심히 키웠던 백조 한 마리(유동성의 급격한 팽창)가 '자이언트 스완'이 되어 백조들이 혼비백산하고 앞만 봤던 금융시장을 거대한 불확실성의 소용돌이로 몰아가는 것이라고 본다.

"공짜 점심은 없다(No free lunch)" 지난 2008년 이후 경기침체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은행들의 전무후무했던 사상 최저의 금리와 양적완화 등의 유동성 공급 부작용은 다른 변수들(원자잿값 폭등, 유통시장의 경직, 임금상승,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그리고 세계공장의 굴뚝 역할을 해온 중국의 수출제품 가격 인상)과 함께 점점 커지는 스노우볼(snowball)이 되어가고 있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의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always and everywhere) 화폐적 현상'이라는 정의가 맞다면 현재의 인플레이션에 대한 공포는 중앙은행들의 책임이며 그에 대한 무조건적(Knee jerk) 반응은 당연하다고 본다. 시장 관점에서의 문제는 중앙은행은 시장금리의 상승(채권 가격의 하락)에 거부감이 없을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반응이 도리어 통화정책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권시장이 위기일 때 중앙은행이 최후의 보루라는 인식 또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고 본다. 또 채권투자를 할 때 당분간 경기 관련 지수보다는 물가 관련 지수에 더 포커스 해야 한다. 경기 침체는 인플레이션의 또 다른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외환시장 측면에서 환율 상승(자국통화 약세)은 수입물가를 이중으로 자극하는 것이므로 중앙은행의 물가안정을 위한 정부와의 '적극적 공조'(외환보유액 활용)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경험상으로 정부의 환율안정 조치(구두개입과 직접개입)와는 별개로 한국은행의 직접 또는 합동 구두개입에 각별히 유의해야 한다.

문제는 향후 인플레이션의 진행 과정에 대한 두 가지 두려움이다. 첫 번째는 정치적으로 일시적으로 억제했던 국내 물가의 상승 압력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플레이션은 지속적 금리 상승과 더불어 실물경제의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고 주식시장의 혼란을 이끌면서 심각한 경기침체(recession)를 항상 야기한다는 점이다. 결국 인플레이션 압력을 초기에 어떻게 진정시킬 수 있을지가 새로운 위기에 선 한국 경제와 금융시장의 도전이자 당면과제라고 본다. (이성희 전 JP모건체이스은행 서울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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