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진정호 기자 = 서원주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이 지난달 취임하자마자 잇달아 특정 기업들을 공개적으로 저격하면서 다소 의아하다는 반응이 뒤따르고 있다.

국민연금 기금본부장은 자리의 무게감 때문에 특정 이슈를 공개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를 벗어난 데다 특정 기업을 저격하고자 별도로 보도설명자료까지 냈기 때문이다. 이런 행보의 배경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는 가운데 국민연금의 공개 압박이 일상화할 수 있다는 불안감도 커지는 분위기다.

◇'굳이' 보도자료 배포한 기금본부장

4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주 열린 서원주 기금본부장의 취임 기자간담회와 뒤이은 보도설명자료 배포는 연기금 업권에서도 화제였다. 서 본부장이 소유분산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를 거론하며 KT 등 특정 기업을 공개 저격한 데다 굳이 보도설명자료까지 낸 것이 상당히 이례적이었기 때문이다.

서 본부장은 간담회에서 "포스코와 KT 같은 기업에서 황제 경영 같은 우려가 해소되려면 지배구조가 건강하게 개선돼야 한다"며 "외부인의 참여를 제한하거나 내부인을 차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만큼 '셀프 연임'에 대한 우려가 없도록 지배구조를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특히 이같은 공개 압박에도 KT가 구현모 대표를 차기 최고경영자(CEO) 후보로 낙점하자 서 본부장은 뒤따라 보도자료까지 내면서 "(KT의 대표 후보 결정은)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기금 투자 관계자는 "언론과 가벼운 상견례 정도로 생각했는데 곧장 KT 등의 지배구조 문제를 저격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며 "그간 국민연금 기금본부장은 특정 기업이나 자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공개 발언을 극도로 삼가는 분위기였는데 앞으로 이런 기조가 바뀌는 것인지 지켜봐야겠다"고 말했다.

다른 연기금 투자 관계자도 "간담회는 그렇다 쳐도 기금본부장 명의로 KT 대표 연임 문제를 지적하는 보도자료까지 낸 것은 진짜 이례적"이라며 "갓 부임한 기금본부장이 독단으로 생각해낸 결과물일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가벼워진 입과 독립성 불안

업계 반응대로 국민연금 기금본부장은 입이 무거운 자리로 통한다. 900조원이 넘는 기금운용의 책임자인 만큼 말 한마디가 특정 기업이나 자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언론과의 접촉도 가급적 피해왔다.

전임 안효준 기금본부장이 재임 4년간 기자간담회나 언론 인터뷰가 없었던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안 전 본부장은 2019년 증권사·자산운용사 대표들과 가진 자본시장 간담회에조차 오해를 낳지 않기 위해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참석자들은 "국민연금이 시장과 협력할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라고 불만을 쏟아냈지만 국민연금기금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키려면 그런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시장에선 지배적이었다.

이같은 전례를 고려하면 서 본부장의 '취임 일성'과 그 배경에 의구심이 커지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갓 부임한 신임 본부장이 국민연금 이사장과 코드를 맞추는 발언을 쏟아내면 기금본부의 독립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연기금 관계자는 "국민연금기금은 외부로부터의 독립성 못지않게 내부에서의 독립성도 중요하다"며 "기금운용은 국민연금 이사장도 관여하지 못하는 것으로 아는데 기금본부장이 이사장과 코드를 맞춘 듯한 발언을 쏟아내면 기금운용 독립성에 대한 의구심이 커질 것이고 다른 연기금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소유분산 기업 개혁은 '공감'

서 본부장의 발언 시기와 방식은 논란을 낳고 있지만, 소유분산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는 지적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도 있다. 특히 구현모 KT 대표가 연임하는 과정에서 사외이사들은 들러리 역할에 그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 국민연금 내부에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국민연금이 KT의 지배구조에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 계기는 지난해 박종욱 KT 각자 대표의 재선임 과정이었다. 당시 KT는 박종욱 대표를 사내이사로 재선임해달라고 요청했는데 KT 사외이사들이 반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민연금은 박 대표가 국회의원 쪼개기 후원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점을 문제 삼아 작년 3월 주주총회에서 그의 재선임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가 기업가치를 훼손하고 주주권익을 침해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결국 박 대표가 중도 사퇴하면서 국민연금은 반대표를 행사하진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거수기 노릇을 한 사외이사단에도 문제의식을 느끼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이 지배구조 문제를 지적하는 소유분산 기업들은 대체로 이같은 문제를 공통으로 안고 있다. 특정 인물이 대표로 이사회를 장악하고 사외이사들을 구슬리면 내부 경쟁 없이 연임하는 '황제연임' 사례가 잇따르고 있는데 이를 바로잡겠다는 것이 국민연금의 입장이다.

국민연금의 입장이 강경한 만큼 KT가 구 대표를 CEO 후보로 밀어붙인다면 오는 3월 주총에서 표 대결은 불가피하다. 이때 결과에 따라 향후 소유분산 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주주행동도 탄력이 붙을지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 전주 본관 전경

 


jhj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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