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선미 기자 = 일본은행(BOJ) 차기 총재가 퇴임을 앞둔 구로다 하루히코가 10년 전 총재에 취임했을 때와 비슷한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12일(미국시간) 진단했다.

구로다 하루히코 BOJ 총재(좌)와 우에다 가즈오(우)

인플레이션이 끈질기게 낮게 유지되고 경제 부진이 이어지는 상황이다.

매체는 1990년대만 하더라도 중앙은행이 이런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믿음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런 믿음이 크게 약해진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BOJ 총재가 바뀌면서 중앙은행이 경제적 기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가 높았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우에다는 실제로 20여 년 전에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

◇ 우에다, 2000년 BOJ 통화정책 실패 예견

지난 2000년 일본 경제가 물가 하락세의 초기 단계였고, 우에다가 BOJ 정책심의위원이었을 당시 WSJ에 기고한 글에서 그는 중앙은행 총재가 경제에 충격을 줄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언급했으며 모든 방법에 부족함이 있다고 지적했다.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2%로 정하는 것은 나쁜 생각은 아니지만 "경제가 회복되려면 통화정책 이외의 다른 근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장기 국채 매입 역시 "그렇게 부양적이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향후 인플레이션이 올 수 있다는 대담한 발언으로 소비자들의 심리를 뒤흔드는 방법은 중앙은행의 약속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비치게 할 우려가 있다고 평가했다.

우에다가 마치 미래를 점치는 수정 구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저널은 지적했다.

구로다 총재는 2013년 총재에 취임하면서 앞서 언급된 모든 조처를 했다. 오는 4월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지만, 그는 여전히 지속적인 2% 물가 달성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경제 위기 때 중앙은행은 종종 통화정책 행보를 급격하게 바꾼다. 2012년 마리오 드라기 당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whatever it taks)'와 같은 발언으로 시장을 구해냈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문제는 급성이 아니라 만성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우에다는 이미 수십 년간 이를 언급해왔다.

제로금리는 통상 소비자와 기업의 대출과 지출을 촉발하지만, 일본의 수요 부족은 지속됐고 전문가들이 '유동성 함정'이라고 부르는 상황이 이어진 것이다. 중앙은행이 금리를 0% 아래로 내릴 수 없지만 구로다는 마이너스(-)0.1% 내리는 조처도 했다.

수요가 만성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는 꾸준하고 완만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기 어렵다. 인플레가 나와야 임금 상승과 기업 투자라는 선순환이 나타난다. 지난해 일본의 물가가 오르기는 했으나 고유가와 같은 외부 요인에 의한 '비용 상승에 의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일본의 물가가 4%로 올랐지만, BOJ는 4월부터 근원 물가가 1.6%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대부분 민간 경제학자들도 비슷한 전망을 하고 있고, 작년 7월 우에다도 이처럼 전망했다.

유동성 함정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구로다는 전 세계가 주목할만한 실험을 단행했다. 시중은행이 보유한 국채를 사들이는 게 핵심적인 전략이었다. 올해까지 BOJ가 보유한 일본국채는 4조달러를 넘어서 유통 중인 국채의 절반 이상을 사들였다.

그러나 수요를 촉발할 다른 요인 없이는 구로다가 원하는 경제의 번영이나 비관론자들이 예측한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붕괴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구로다의 정책이 보여줬다.

BOJ의 조치는 시중은행이 국채를 중앙은행에 팔고 다른 정부 자산을 갖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디스 애널리틱스의 스테판 앵그릭 이코노미스트는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했나. 이것은 그저 하나의 자산을 다른 것으로 바꾼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 중앙은행 역할 비관론↑…경기부양 논쟁 격해질 듯

최근 몇 년 사이 우에다가 쓴 글에는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비관적인 기조가 종종 드러난다. 그는 지난 10일 기준금리를 낮게 유지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구로다의 정책을 이어갈 것이라고 시사했다.

애널리스트들은 우에다가 구로다가 정한 10년물 국채금리 상한선을 수정하거나 폐기할 것으로 보고 있다. 앵그릭은 전반적인 금리를 낮게 유지하면서 이런 조처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관측통은 구로다가 취한 조처의 영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코로나19 봉쇄를 해제하고 관광산업이 반등하면서 일본이 2%의 꾸준한 물가를 달성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구로다 총재 체제에서 BOJ 정책심의위원을 맡았던 마사이 다카오는 구로다 정책이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면서 특히 엔화 가치를 낮춘 것을 언급했다. 그는 구로다가 상황이 개선됐을 때 건전한 인플레이션 불을 지필 수 있도록 "석탄을 준비시켰다"고 설명했다.

구로다를 응원하는 리플레이션(통화 재팽창) 주의자들은 불이 계속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조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군사 지출을 포함해 정부가 제품과 서비스에 직접 현금을 지출하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연구원을 지낸 올리비에 블랑샤르는 최근 발간한 저서에서 "매우 높은 부채에도 일본이 부채 지속성 문제에 직면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녹색 기술과 같은 대규모의 공공 투자가 합리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일본의 부채가 미래 세대에 부담이라면서 세금 인상을 주장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 정부에서 재무성 관리를 지낸 혼다 에츠로는 세금 인상을 "비교할 수 없는 어리석은 정책"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일본 경제가 아직도 우에다가 20년 전 언급한 유동성 함정에 사실상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분명히 재정 부양책이 필요하다"면서 "지금 실행에 옮긴다면 경제 성장을 촉발한 이례적으로 효과적인 정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발언을 보면 올해 일본 경제를 어떻게 구해낼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예상된다고 저널은 말했다. 단순히 우에다가 망토를 입은 구원자로 날아올 것에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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