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낮으로 일하던 1990년대 초 어느 날 늦은 저녁, 담당 책임자가 '중앙은행의 가장 기본적 업무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졌다. 이 뜬금없는 질문에 발권, 즉 화폐 발행이라고 답을 했으나 그는 '환(換)'이라 했다.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멀리 있는 채권자에게 현금 대신에 어음, 수표, 증서 따위를 보내어 결제하는 것'이라는 국어사전의 정의로는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 깊은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지난 학기 경제원론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설명했다.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지폐와 동전, 즉 현금보다 은행이 만들어내는 돈, 즉 예금의 양이 훨씬 많으며, 대부분의 경제거래는 은행예금으로 지급이 되고 결제가 된다고.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돈(본원통화)은 지급에 사용된 서로 다른 은행 예금의 '교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고. 나는 수십 년 전 상사의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하고 있다. 중앙은행의 원초적인 역할은 지급결제의 완결 기능, 즉 환(換) 기능에서 나온다고, 그것이 통화정책 수행능력의 원천이라고.

다소 난해한 화폐금융론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는 것은 2024년이 화폐와 금융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시기가 아닌가 해서이다. 현대 시장경제는 법정화폐(fiat money) 제도 위에 존재한다. 화폐가 교환수단으로 사용되는 것은 그 가치가 일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사회적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이 흔들릴 때 경제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화폐제도의 불안정을 막고 화폐의 가치를 지켜 나가는 데 있어서 중앙은행의 본원통화 관리는 정말 중요하다.

1979년 10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 폴 볼커(Paul Volker)는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연준의 정책 운용을 이자율목표 방식(federal funds rate targeting)에서 은행의 지급준비금 목표방식(reserves targeting)으로 변경하였다. 이에 대해 여러 평가가 있지만 필자는 앞서 언급한 중앙은행의 환 기능, 특히 은행제도 및 금융시장에 결제 유동성을 공급하고 이를 관리하는 본원적 기능에 주목한다. 미국은 1960년대 이후 지속된 완화적인 통화·재정 정책으로 결국 강력한 유동성 긴축 없이는 물가 안정이 어려워지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볼커 의장은 중앙은행 본연의 유동성 관리방식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20년 팬데믹 과정에서 연준의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QE)는 위기 극복에 큰 기여를 했다. 은행제도와 금융시장의 파생통화 붕괴에 대응해 본원통화를 확대 공급함으로써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왔다. 그러나 이는 벤 버냉키 연준 의장이 2009년 설명했듯이 일시적인 응급조치이다. 반복되거나 연장되고 더 나아가 성장을 부추기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서는 안 된다. 화폐 가치에 대한 사회적 믿음이 약화되면 인플레이션, 금융시장 불안, 화폐제도의 혼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22년 이후 연준은 양적긴축(Quantitative Tightening, QT)을 진행 중이다. 2008년 위기 전 1조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던 연준 자산은 세 차례의 QE를 거치면서 2014년 말 4조달러를 초과하는 수준으로 커졌고, 이후 이를 정상화(Normalization)하려 했으나 2019년 9월 레포(repo) 금리 급등 등의 시장 불안이 확산되면서 오히려 750억달러의 유동성을 추가 공급했다. 그리고 팬데믹 이후 재개된 무제한 QE로 2023년에는 연준 자산이 8조9천억달러에 이르렀다. 15년 동안 10배로 커진 것이다. 현재까지 QT를 통해 자산을 1조달러 조금 넘게 축소하였으나 여전히 7조달러를 훌쩍 넘고 있으며 달러 현금은 차치하고 3조달러가 넘는 유동성이 고 유동성 자산으로 은행권에 남겨져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QT의 속도 완화 또는 중단 가능성이 다시금 제기되고 있다. 2023년 12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이에 대해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고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 로리 로건(Lorie Logan)은 금융시장의 유동성 감소와 연준의 RRP(Reverse Repo) 잔액 감소에 따라 QT 속도를 둔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2019년 경험이 그 배경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연준 자산이 7조달러를 넘어서고 있고 은행 지급준비금이 3조달러가 넘는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연준이 과연 자산규모를 제대로 정상화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중앙은행의 본원통화는 몇 배에 해당하는 파생통화(예금)를 발생시킨다. 예금은 은행의 대출, 회사채 투자와 함께 만들어지며 이는 곧 기업과 가계의 투자 및 부동산 구입 등에 사용된다. 즉 빚을 통해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연준의 확대된 자산규모는 빚에 의해 만들어진 실물경제의 크기를 대변한다. 15년 동안 지속된 연준 자산 확대는 미국 기업과 가계의 자산을 크게 성장시켰다. 5,000을 넘은 S&P500 지수, 높은 부동산 가격의 이면에는 엄청나게 확대된 유동성이 존재한다. 이토록 크게 확대된 연준 자산이 과연 실물경제에 충격을 주지 않고 한두 해 만에 축소될 수 있을까. 만일 아니라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연준의 고민이 클 수밖에 없다.

다행히 한국은행은 그런 딜레마에서 조금은 자유스럽다. 팬데믹 때 한국도 QE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있었다. 당시 우리 사정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한은 내부의 치열한 토론과 적확한 판단을 통해 금융통화위원회가 중심을 지켜낼 수 있었다고 자평한다. 2021년 늦봄 연준이 머뭇거리고 있을 때 가계대출 급증 및 물가 불안에 대응해 정책금리 인상을 서둘러야 한다는 실무진들의 주장과 이후 이어졌던 가열한 논의 과정이 기억난다. 그들의 헌신과 용기에 감사한다.

(이승헌 숭실대 교수/ 전 한국은행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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