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나 달러화를 대신해 교환 매개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만들어진 디지털 화폐. 그런데 가격 등락이 심해 커피도 사 먹지 못하는, 투기 외에는 아무런 사용처가 없는 쓸모없는 물건. 최근 일반인들이 가진 가상자산 전반에 대한 인식이다. 이런 오해가 만들어진 데는 '가상화폐'라는 단어가 한몫하고 있다.

사람들은 '화폐'라는 단어에서 교환 매개 수단을 떠올리며 이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가상화폐'는 가치가 없다고 결론짓는다. 심지어 이더리움처럼 만들어진 목적이 비트코인과 전혀 다른 자산까지도 통틀어 가상화폐로 불리기 때문에 모든 가상자산이 교환 매개 수단이 아니면 가치가 없는 버블 내지 사기라고 생각한다. 잘 알려진 한 가상자산 비판론자는 최근에 '왜 진짜 돈을 주고 가짜 돈을 사는지 이해 못 한다'고 했다. 대중들의 오해를 그대로 반영한 발언이다.

이러한 혼란의 이유는 우리가 가진 화폐에 대한 인식이 크게 왜곡돼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유행한 케인스학파는 현대인의 경제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케인스학파의 사상은 현대 국가가 만들어지고 정부 정책의 틀이 잡혀가던 시기, 정치적 니즈에 힘입어 대세 이론으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화폐 시스템 또한 국가에 막강한 파워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수렴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촉발된 금본위제의 폐지, 그 후의 경제 대공황,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혼란을 겪으며 세계열강은 통화량 조절을 통해 경제활동을 관리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금 기반 화폐 시스템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지난 1944년 맺어진 브레턴우즈 체제하에서 미약하게나마 금과의 연결고리를 남겨 놨지만, 이마저도 1971년 닉슨 쇼크 후 폐지됐다. 그 후 지금까지 화폐 발행은 100% 정부의 재량이며 현대인들은 이러한 지금의 체제를 당연시한다.

하지만 이는 5천년 인류 화폐 역사 중 불과 1%인 과거 50년간의 상황이다. 인류 화폐 역사의 99%는 지금처럼 권력기관이 좌지우지하는 체제가 아니라 물리적 자산의 공급량에 따라 화폐 공급량 또한 제한되는 체제였다. 자산의 역할을 한 물건은 그 시대의 상황이나 기술에 따라 다양했다. 예를 들어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밀, 금, 은 등이었고 중화 문명권에서는 조개껍데기, 구리 등이었다. 로마제국에서는 한때 소금을 사용했고 아프리카에서는 비즈가 그 역할을 했다. 북미에서는 원주민들이 조개껍데기로 만든 '왐펌'이라는 장식품을 화폐로 사용했고 매사추세츠주는 이를 공식 법정화폐로 인정해 19세기 중반까지 교환 매개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물건들은 그 희소성이 없어지면 가치를 잃고 다른 물건으로 대체되는 과정을 반복하다 결국 19세기 말 유럽 열강을 중심으로 금으로 귀결됐다. 물건이 화폐가 되는 과정의 공통점은 권력 기관이 톱다운(위에서 아래)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수십 년간 상호작용을 통해 서서히 자연스럽게 형성된 보텀업(아래에서 위) 프로세스였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화폐의 모습이다.

과거 다양한 물건을 화폐로 사용했던 인류는 과연 비트코인이라는 새로운 자산을 화폐로 받아들일까. 지난달 15일 기고문에서 비트코인은 인터넷처럼 탈중앙화된 네트워크상에서 가치 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회원권 같은 자산이라고 했다. 비트코인이 화폐가 되려면 화폐의 3가지 역할인 가치 저장 수단, 교환 매개 수단, 가치 측정 단위(회계 수단)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할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비트코인 장기 투자를 고민하는 이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이다. 이는 위에 언급한 화폐 역사의 99%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상상해 보면 알 수 있다. 조개껍데기, 금, 은 등이 처음에는 장식품 용도로 수집되면서(1단계),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두 가치를 부여한다. 이렇게 특정 공동체 내에서 가치 보존 수단이 되고(2단계), 그 보유자들의 저변이 충분히 확대되면 교환 매개 수단으로 사용되며(3단계), 최종적으로 그 구성원들이 이를 회계의 단위로 사용하면서 비로소 화폐가 되는 것이다(4단계). 영국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William Stanley Jevons)는 'Money And The Mechanism of Exchange'라는 저서에서 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 4단계 과정 중 가장 많은 가치 상승이 일어나는 구간은 가치 저장 수단으로 저변이 확대되는 2단계다. 기존의 효용가치(utility value)에 더해 통화가치(monetary value)가 네트워크 효과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만으로도 비트코인은 충분한 투자가치가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3·4단계가 오면 좋겠지만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유이다. 비트코인이 현재 2단계 초기에 있다는 사실은 과거 수년간 비트코인이 선진국 연기금 투자 포트폴리오에 편입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화폐에 대한 편협한 인식 때문에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 오로지 교환 매개 수단에만 매달려 가상화폐의 가치를 평가하려 한다. 비트코인이 가치를 가지려면 교환 매개 수단이 돼야 하는데 CBDC(중앙은행 디지털화폐)가 출범하면 이를 대신할 것이니 비트코인은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지 않아도 오해가 많은 분야인데, 우리의 잘못된 '화폐'에 대한 인식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다. 인터넷 이상으로 인류에게 이로운 기술인 비트코인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다면 대화에서 '화폐'라는 단어를 '자산'이라는 단어로 바꿔 사용해보자. 지금까지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던 것이 조금씩 풀리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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