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들의 조선 말기 관련 기록에서 종종 언급되는 것이 당시 조선의 형편없는 도로 사정이다. 1894년 조선을 방문한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는 그녀의 저서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조선이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낙후된 도로 사정을 언급했다. 그만큼 조선은 수백 년간 길을 닦는 것에 대해 무척 소극적이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지도층이 필요를 못 느껴서였다. 길을 닦으면 오히려 오랑캐가 침략하기 쉬워 국가 안보에 위협이라는 '무도즉안전(無道則安全)'의 논리를 내세우며 반대했다. 숙종은 이를 두고 '치도병가지대기(治道兵家之大忌: 길을 고쳐 닦는 일은 병가가 크게 꺼리거나 싫어함)'라고 표현했다.
반복해서는 안 될 '웃픈' 역사의 한 페이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현재 국내 가상자산 업계에서 일어나고 있다. 규제 당국은 법적 근거 없는 행정지도를 바탕으로 국내 법인의 가상자산 거래 참여를 금지하는 상황이다. 개인투자자만 거래 참여를 허가하고 법인은 금지하는 차별화 정책을 펴는 것이다. 업계 외에는 아직 이런 사실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이에 대해 목소리를 내는 이들도 소수뿐이다. 가상자산의 본질에 대한 이해 없이 투기 자산으로만 생각하는 국내 풍토에서는 대중들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이는 모순된 정책일 뿐 아니라 시정되지 않으면 막대한 국가적 손실이 발생한다.

정부는 겉으로는 가상자산 산업을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 간주하고 육성하려는 의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우리는 국민의 뜻을 존중해 전체주의 국가 중국처럼 가상자산을 전면 금지하지 않았다.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특금법) 개정안 등의 입법과정으로 이미 제도권화의 길에 들어섰고, 부산 블록체인 특구 지정, 대통령 선거 공약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가상자산 산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는 민간기업들이 가상자산 산업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당연한 일이 현재 불가능하다. 국내에서는 기업이 가상자산 산업에 진출하기 위해 필요한 가상자산의 취득이나 합법적인 현금화의 방법이 없다. 연예 기획사가 K팝 아티스트 데뷔 1년을 기념하는 대체불가토큰(NFT)을 전 세계 팬들에게 발행하고 이더리움(ETH)을 판매대금으로 받을 경우 이를 현금화할 방법이 없다. 혹은 NFT 최고 명품인 BAYC(Bored Ape Yacht Club)의 원숭이 NFT를 자사 브랜딩에 사용하고 싶은 국내 패션 회사가 해당 NFT를 글로벌 NFT 거래소 오픈시(OpenSea)에서 구입하려고 해도 지불수단으로 사용되는 이더리움을 취득할 방법이 없다. 가상자산 사업자 신고를 완료한 거래소가 합법적으로 이를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하다. 은행이 가상자산 거래를 위한 실명계좌를 법인 명의로 발급해줘야 하는데 법적 근거 없는 규제 당국의 행정지도가 이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가상자산 사업 진출을 포기하고, 큰 뜻을 품은 기업들은 국내 규제를 피해 해외법인을 가상자산 사업의 거점으로 삼는다. 그 결과 가상자산 사업 투자에서 발생하는 고용 창출, 인력 육성, 투자 지출 등의 경제효과는 상실되거나 해외로 유출된다.

한쪽에서는 미래 먹거리 산업 육성을 외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산업에 진출하려는 기업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가상자산 업계의 현실이다. 이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있는 금융 당국의 명분은 가상자산은 위험한 자산이라서 법인들에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막겠다는 것이다. 위험 자산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대상은 일반 개인투자자인데 개인은 접근을 허용하고 오히려 법인은 금지한다는 논리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산업 육성을 외치는 정부 기관들이나 기타 각종 협회가 법인의 가상자산 취득 및 현금화가 국내에서는 불가능한 현실을 이해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이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의 산업 육성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해외는 어떨까.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법인 명의로 거래소 계좌를 만들 때 아무 문제가 없다.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권고안을 준수하는 절차에 따라 신청하고 승인을 받으면 법인도 개인과 똑같이 계좌를 개설하고 거래할 수 있다. 미국 최대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의 가상자산 거래에서 법인 고객의 비중은 전체 거래량의 60~70%다. 법인의 가상자산 취득과 현금화가 원활하게 이뤄지기 때문에 많은 기업이 가상자산 산업에 진출해 엄청난 규모의 경제 효과를 누리고 있다. 거래소, 노드 운영사, 장외거래 중개인, 채굴업체 등의 회사들이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사업을 영위하며 지난 수년간 보수적으로 잡아도 총 100조 원 이상의 기업가치를 창출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낸 고용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대거 신기술을 접하면서 축적된 역량은 미래 산업 성장의 원동력이 된다. 전문 자산운용사들이 가상자산 시장에 참여하면서 시장의 질이 업그레이드돼 사기성 행위가 발붙이기 어려워지고 투자자 보호 효과도 기대된다. 자산운용사들의 자산 배분 범주가 확대되며 자산 포트폴리오의 리스크 조정 수익률도 개선된다. 자산운용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미국 예일대 기금은 2020년부터 비트코인과 이더리움에 직접 투자하고 있다.

글로벌 리서치 기업 PwC의 자료를 참고하면 글로벌 가상자산 산업은 향후 8년간 2조 달러에 가까운 경제 가치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중 우리나라의 점유율을 늘리려면 국내 기업의 가상자산 산업 진출을 가로막는 정책은 사라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상자산 산업에서 파급되는 경제가치 창출과 고용의 기회는 고스란히 해외 몫이다. 가상자산 산업의 경제 가치 창출 과정에서 가상자산 취득과 현금화의 길이 막혀 국내 기업이 참여하지 못하는 것은 마치 1960년대 국내 기업이 달러 환전을 지원받지 못해 수출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법인의 투자 손실 리스크를 정부 개입으로 해소하고자 한다면 접근 자체를 차단하는 정책 대신 리스크 관리에 대한 교육을 늘리거나 가상자산 투자 비중에 한도를 두는 방법 등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오랑캐의 침입은 외교나 군사력 증대로 막는 것이지 국가 발전의 근간이 되는 도로망을 희생시키는 것이 답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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