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외환시장에 불이 붙어 금융시장의 관심이 환율에 집중되다가 다행스럽게 상단(추가 상승)이 제한되고 주식시장과 함께 어느 정도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금융 불안심리가 이제는 국내 자금시장과 채권시장에 번져 유동성 경색(liquidity crunch)과 신용 경색(credit crunch)이 발생했다. 시장금리급등과 더불어 금융기관들은 몸을 사리고, 기업체들은 유동성 확보에 사력을 거는 등 큰 홍역을 치르고 있다. 10월 23일 금융당국이 내놓은 특단의 안정화 조치로 단기적으로는 다소 진정되는 것같이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기록적인 적자로 인한 한국전력공사 채권(한전채) 발행이라 생각한다.

많은 전문가가 레고랜드의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이 그 경색의 시발이라 진단하지만, 문제는 소모적인 정치논쟁이 약해져만 가는 경제에 더 큰 혼란과 고충을 주는 점이다. 레고랜드 ABCP에 지방자치단체의 보증철회도 번복되었지만, 결국은 보증 절차의 적법성에 대한 정치논쟁에서 비롯되어 회생절차(보증철회 가능)라는 극단의 조치가 신용경색의 촉매가 된 것일 뿐이다. 이미 많은 시장관계자가 이보다 심각하게 우려했던 것은 매일 평균 1천억원 이상의 '묻지마 발행'식의 한전채에 대한 불안이 이미 연초부터 심각했던 점이다. 상반기 적자 14조원, 연간 30조원에서 35조원까지 적자가 예상되는 가운데 적자 보전을 한전채 발행으로만 메우려는 상황은 연초부터 유동성 고갈과 더불어 채권시장의 기본원리(신용등급에 따른 credit spread·가산금리)마저 심각하게 왜곡시켰다. 국채와 동일한 신용등급(AAA)인데도 가산금리가 계속 확대된 것은 채권의 기본원칙이 붕괴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로 인해 다른 공사채와 회사채 가산금리까지 확대되는 등 신용경색의 조짐이 시작되었다. 만약 민간기업이 한전과 같은 적자였다면 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이미 정크본드(Junk bond)로 전락했을 것이다.

한전의 기록적인 적자의 원인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대규모 적자를 어떻게 빠른 시일 내 해결할 것인가이다. 이것 또한 잘잘못의 정쟁에만 머무는 가운데 근본적 해결책을 어느 누구도(책임회피의 여야 정치인들이든 관련 정부부처이든) 선뜻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한전의 적자는 전력시장의 구조적 문제와 일부 자체적인 방만한 경영에도 있겠지만, 작년부터 시작된 국제 에너지 가격의 급등이 근본적 원인임이 자명하다. 국민들도 글로벌 상황변화에 따른 적절한 전기료 인상은 이해하고 감내했을 텐데 탈원전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에 갇혀 전기료는 정권 마지막까지 동결됐다. 정권이 바뀌었지만 현 정권은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물가안정이라는 명분으로, 또 전 정권의 책임이라며 소폭의 전기료 인상만 허용하고 근본적인 대책을 미루는 것 같다. 한전의 적자는 국가적 인플레이션의 보정 비용이라 할 수 있다. 만약 한전이 적자가 발생하지 않는 수준까지 전기료를 인상했다면(산술적으로 대략 한전의 매출이 60조원이라면 전기료를 50% 인상할 경우 30조원의 적자가 개선) 우리나라의 물가수준(CPI·PPI)은 대체 어디에 있을까 반문해본다. 분명 지금보다는 엄청난 물가 상승 압력에 사회적 불만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 전기료의 급격한 인상은 경제에 심각한 부작용을 발생시키므로 다른 방법으로는 재정투입에 의한 보전밖에 없지만, 현행법상 불가능하다. 만약 올해 30조원의 적자가 발생하고 내년에는 전기료를 소폭 올려 20조원의 적자가 발생할 경우, 내년에 한전이 감당할 이자는 기존의 이자 비용과는 별도로 신규발행 채권에서만 2조원이 넘을 것이다.

2009년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100조원 부채 사태와는 성격이 다르다. LH의 부채는 부동산개발에 따른 자산성 부채로 적절한 자산매각(분양)으로 해결 가능한 것이었다면 현재 한전의 부채(채권발행)는 적자성 부채의 자본잠식으로 대규모 흑자전환 또는 자본투입 외에 해결 방법이 없다. 정부의 채권시장안정화대책이 단기적으로 효과를 내더라도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채권시장은 살얼음판을 계속 걸을 수밖에 없다. 한전채 발행을 줄이고 은행의 대출로 전환하는 것도 이미 금융기관의 여신한도가 소진된 상황에서 분명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설령 일부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자금조달을 위해 추가적인 은행채 발행 또는 예금유치(예금금리 인상)를 통할 수밖에 없으므로 자금의 편중이 다시 발생하며, 한전의 조달 비용 역시 은행의 대출마진으로 채권발행(무담보) 비용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

시장기능과 정부(산업통상자원부·기획재정부)의 법적 권한에도 해결이 안 되는 것은 조속한 정치적 해결(합의)밖에 없다. 정쟁을 떠나 국민들이 이해할 옳은 길이라면 누군가 용기 있는 결단력을 보여야 한다. 2008년 금융위기는 대외 요인에 의해 발생했고 1997년 외환위기는 국내 민간기업의 과다부채에서 시작되어 국내 금융 시스템의 붕괴와 더불어 굴욕적인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까지 받았다. 많은 이들이 또 다른 금융위기를 이야기한다. 'I maybe wrong'이라는 심정으로 공공 부분에서 시작된 새로운 복합적 경제위기가 나타나지 않기를 소망한다. 방임은 탐욕의 또 다른 얼굴이다. 시장경제에서의 탐욕(greed)에는 반드시 공포(fear)가 뒤따른다.

'이태원 참사에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이성희 전 JP모건체이스은행 서울지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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