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사고가 많았던 올해 가상자산업계에 던져진 가장 큰 숙제는 바로 '규제'다. 잘 만들어진 합리적인 규제는 신기술의 대중화를 촉진한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대중들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교통법이 없었다면 자동차라는 신생 기술이 대중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문제는 신기술의 속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만들어지는 규제다. 그런 규제는 신기술이 가져올 혁신을 해치는 것은 물론 그 규제가 의도하는 소비자 보호조차 제대로 이루지 못할 수 있다. 이를 피하려면 가상자산의 본질 파악이 필수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기존의 증권법을 적용해 가상자산을 규제하려 하고 있다. 특히 국내 업계 관계자들이 제시하는 규제에 관한 의견들을 보면 가상자산을 일종의 주식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 증권법은 주식이나 채권 등 증권 시장의 투자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오랜 기간 검증된 규제 프레임이다. 수십 년간 다듬어져 이미 잘 작동하는 규제 프레임의 범주에 가상자산을 포함해 혁신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투자자 보호를 할 수 있다면 이는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하지만 증권과 가상자산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증권은 투자계약이다. 계약이란 쌍방의 약속이다. 증권 보유자는 발행자의 손익에 대한 권리(claim)를 가지며 발행자는 이를 이행해야 할 채무가 있다. 그러나 가상자산은 다르다. 어떤 특정 주체가 네트워크를 설계하고 그 네트워크상에서 가상자산이 발행(채굴)된다.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표현이지만 편의상 그 주체를 발행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 가상자산의 보유가 소위 발행자의 손익에 대한 권리를 뜻하지 않는다. 오픈소스 코드로 구현되는 열린 네트워크상에서의 활용처만 존재할 뿐이다. 즉, 가상자산은 그 기반이 되는 네트워크가 제공하는 효용을 사용할 때 필요한 회원권과 같은 자산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민법상의 조합을 생각하면 된다. 조합원들은 조합이 제공하는 효용을 누릴 수 있다. 가상자산은 그 효용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조합원 회원권과 같은 자산에 비유될 수 있다.

이더리움을 예로 들어보자. 이더리움 네트워크의 고유 자산인 이더(ETH)를 보유한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커뮤니티)를 형성해 이더리움 네트워크의 활용처를 넓히기 위해 노력한다. 그 결과 활용처에 대한 수요가 늘고 활용 시 필요한 이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해 가격이 상승하면 이더 보유자들은 투자 이익을 얻는다. 이 과정은 주식 보유자가 투자 수익을 실현하는 과정과 다르다. 주주가 주식을 발행한 회사에 손익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듯이 이더 보유자들이 이더리움 재단에서 발생한 손익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재단 수익의 일부를 배당으로 가져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 자산을 기존 증권법의 적용 범위를 확장해 포함시키는 규제 방법이 최선의 선택일까. 이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물론 긴 시간에 걸쳐 가상자산에 특화된 새로운 투자자보호법을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 증권법을 적용하는 것이 투자자 보호가 시급한 상황에서는 효율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발행자와 보유자 간의 채무 관계가 존재하는 투자계약을 전제로 만들어진 프레임을 채무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자산에 적용하는 것이 적절한지 살필 필요가 있다. 특히 가상자산은 중개인 없이 가치 전달을 가능케 하는 네트워크에서 사용된다. 반면 증권 거래는 예탁결제원, 한국거래소, 증권사 등 중개인이 겹겹이 존재하는 시스템 안에서만 가능하다. 증권법은 이러한 시스템을 기준으로 짜여진 법규이기 때문에 가상자산을 증권법 규제하에 놓으려면 오로지 법규 준수를 위한 목적으로 중개인을 구축해야 한다. 가상자산 기술의 혁신 포인트가 중개인이 없다는 것인데 이를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반면 현재 증권법은 가상자산 네트워크 고유의 성질인 보안이나 스테이킹에 관한 문제들을 다루고 있지 않아 이에 관한 리스크로부터 투자자들을 충분히 보호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일부 유사한 면이 있다는 이유로 증권법을 가상자산에 적용하는 것은 한 사람에게 제작된 맞춤형 수트를 체격이 전혀 다른 누군가에게 억지로 입히려는 것과 같다.

현재 국회에서 진행 중인 가상자산 기본법에 대한 논의는 이러한 근본적인 차이의 파악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규제 당국의 행정지도 또한 증권법의 규제 프레임을 복사 및 붙여넣기 하는 것이 적절한지 사안별로 꼼꼼히 따져야 법적 근거 없는 공권력 개입에 대한 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투자자 보호와 혁신은 모두 공익을 위해 중요한 가치이며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신기술 분야의 규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서는 '규칙'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야 한다. 증권법의 프레임을 적용하는 이유가 원칙에 기반한 결정인지 아니면 단순히 익숙해서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만 훗날 공익을 위한 정책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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