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차게 새해를 시작해보자는 뜻에서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보자. 대한민국이 세계 5대 강대국 대열에 합류하는 상상이다. 국내총생산(GDP) 규모로 따지면 지금의 영국 수준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 독일 다음 위치다. 중요한 글로벌 이슈가 있을 때마다 국제 사회가 의견을 존중해야 하는 나라일 것이며, 큰 재난을 겪는 나라에 눈치 보지 않고 소신껏 통 큰 지원까지 할 정도의 부유한 나라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인플레이션, 가계 빚, 저출산 등으로 국가 경제 앞날이 어려운 마당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되물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긴 안목과 깊은 통찰력으로 미래 산업을 육성하고 약간의 운이 따라 준다면 50~70년 안에 5대 강대국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이런 비전을 실현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산업이 가상자산 산업이라고 생각한다.

과거, 인류 사회의 어느 특정 집단이 막강한 부를 축적하는 과정은 교역량 확대를 통해 이뤄졌다. 중세 이전 유럽과 아시아의 교역 통로를 장악했던 아랍 지역의 중개 무역 상인들이 한 사례다. 대항해 시대부터는 항로를 장악한 서유럽 상인들이 기존의 육로를 우회하며 부의 창출을 주도했다. 교역은 통신과 더불어 네트워크 효과의 혜택을 톡톡히 보는 분야 중 하나다. 네트워크 효과란 어느 특정 네트워크가 제공하는 효용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용가치가 높아지는 효과를 말한다. 서유럽 상인들이 항로를 개척해 신대륙, 인도, 동남아시아 등으로 새로운 교역 활동지를 확보하고 늘려가면서 교역망의 네트워크 효과는 증가했고 더 많은 부가 축적됐다. 포르투갈이 처음 확보한 항로 패권은 시간이 지나면서 스페인,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으로 넘어갔고 세계 경제 주도권도 이를 따라 이동했다.

무역의 이권 다툼에 공권력이 동원되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원동력은 민간 상인들의 이윤추구였다. 원거리 교역을 성사시키기 위한 민간 상인들 간의 자금 조달 및 리스크 분산의 노력은 훗날 현대 사회가 누리는 국제 금융 시스템의 근간이 됐다. 또한 교역 활동의 파트너 및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이권 다툼은 많은 비유럽권 지역 국경의 시작이기도 하다. 현재 세계 지도상의 국경은 이처럼 유럽 열강의 교역 활동 확장 과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며 굳어졌다.

아쉽게도 중세 이전까지 전 세계 GDP의 반을 차지하던 아시아 경제권은 교역 활동 확장을 위한 공간 확보를 주도하지 못하고 대항해 시대의 부의 창출 과정에 동참하지 못했다. 그나마 일본이 19세기 중반부터 순발력 있게 대응해 유럽 열강 주도하에 구축된 교역 네트워크에 동참했다. 2차대전 이후에는 한국이 합류했고 1980년대부터 중국이 서서히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21세기 들어서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과 동시에 본격적으로 교역 파트너로 부상했다. 15세기 유럽 대항해 시대의 시작을 교역 활동지 선점을 위한 무한 경쟁의 출발점으로 본다면 족히 500년은 늦었다. 속된 말로 '판 다 깔린 후'에 뒤늦게 합류한 셈이다. 한국이 이 과정에서 기회비용을 톡톡히 치러야 했음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만일 앞으로 새로운 기술에 힘입어 교역 활동을 기하급수적으로 늘릴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면 다시는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 세대가 그런 실수를 저지른다면 더 이상 조선의 개화를 지연시킨 흥선대원군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가상자산 산업이 그런 공간을 디지털 세계에서 만들어 내고 있다. 인터넷은 정보가 중개인(마찰) 없이 자유롭게 유통되는 공간이며 이것만으로도 지난 30년간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바꿔놨다. 비트코인 기술의 등장은 중개인(마찰) 없이 자유롭게 유통시킬 수 있는 대상에 '자산'을 추가했다. 사토시 나카모토는 그동안 불가능했던 디지털상에서의 소유권과 희소성을 중개인 없이 구현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8페이지짜리 백서에서 시작된 이 작은 사회 실험은 현재 14년째에 접어들었으며 300조 원을 넘는 무시할 수 없는 자산으로 성장했다. 비트코인에 영감을 받은 크고 작은 다른 실험으로 생겨난 자산까지 합치면 현재 가상자산의 시가총액은 800조 원을 넘는다. 이처럼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거리의 제약을 받지 않고 중개인 없이 자유롭게 교역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아직은 이 기술의 초기 단계로서 사용에 서툴러 사건 사고도 따른다. 일종의 성장통이다. 대항해 시대에 비유하면 15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항해의 왕자 엔리케'가 맞바람에도 직진이 가능한 삼각돛 범선을 개발해 서아프리카 해안을 탐색하기 시작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새로운 신대륙인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가상자산 기술의 등장으로 이제 막 판이 다시 깔리려 하고 있다. 이 신대륙에서 기존의 오프라인 세계의 무역 질서나 빅테크의 영향력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세계 무역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신대륙을 개척한 당시 '듣보잡'이였던 미국이라는 신생 국가가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것처럼 어느 특정 집단이 인터넷이 재편되는 과정 중 조금만 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면 훗날 누릴 수 있는 선점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2023년은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가상자산 법규를 만들기 위한 지난 수년간의 노력이 어느 정도 결실을 맺는 한 해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항해 시대의 기회를 잘 살린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가 있었듯이 가상자산 기술이 제공하는 기회를 잘 살리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들로 나뉠 것이다. 한국은 어느 쪽일까. 이를 결정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가상자산 관련 국내 법규나 정책들이 긴 안목과 깊은 통찰력이 반영된 결과물이길 바란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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