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은 남태평양 섬들을 공군 기지로 사용하였다. 이 섬들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은 미군을 통해 처음으로 현대 문명을 접했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경험한 원주민들은 전쟁이 끝나고 미군이 떠나자 그들을 그리워했다. 원주민들은 미군의 화물 비행기가 물질문명을 실어 온 것을 기억하며 미군들의 행동을 따라 하면 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풀을 뽑아 활주로를 만들고, 모닥불로 유도등을, 오두막으로 관제탑을 흉내 냈다. 대나무로 안테나를 만들고 헝겊으로 미국 성조기를 만들어 게양하였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이전에 봤던 비행장의 모든 것을 자신들의 관점에서 구현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비행기는 오지 않았다.

이는 '화물 숭배'라고 일컫는 실화다. 제한된 지식이나 관점을 갖고 있는 사회 집단이 생소한 현상을 보고 선후관계를 인과관계로 착각할 경우 발생한다. 화물숭배는 웃고 넘어가는 하나의 해프닝 같지만 현대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다. 국내 가상자산 업계가 수년째 유의미한 블록체인 기술의 쓰임새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현재 상황이 그러하다.

블록체인의 쓰임새를 만들어내려면 이 기술이 왜 유용한가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블록체인은 중개인(주인)이 없는 탈중앙화된 네트워크다. 중개인이 통제하는 네트워크는 사용자에 차별을 둔다든지, 임의로 네트워크의 작동을 멈춘다든지 할 수 있다. 이동통신 3사의 통신망은 중개인이 통제하는 네트워크, 인터넷은 중개인이 없는 네트워크의 예이다. 우리는 중개인 없는 네트워크의 장점을 국내에서 잘 느끼지 못한다. 보통 국내에서는 전화 통화를 그냥 010으로 하지만 상대방이 해외에 있으면 통화료가 비싸 보이스톡을 사용한다. 두 중개인(국내 통신사, 해외 통신사)을 넘나드는 국제전화는 높은 중개 수수료가 발생하는 반면, 보이스톡은 중개인이 없는 정보망인 인터넷을 사용하여 목소리가 전달되기 때문에 몇시간 통화해도, 심지어 영상통화를 해도 비용 발생이 거의 없다.

이처럼 중개인이 없는 네트워크는 중개인의 테두리를 넘나들 때 진가를 발휘한다. 중개인의 통제가 없으면 일종의 공공재처럼 누구나 접근 가능하고(비허가성) 24시간 상시 작동하기 때문에(검열저항성) 네트워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인터넷과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모두 탈중앙화된 네트워크로 이러한 성질을 공유한다. 차이점은 인터넷의 전달 대상은 '정보',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가치'라는 점이다. 여기서 '가치'란 희소성을 겸비한, 중개인의 도움 없이 소유가 가능한 자산을 뜻한다. 따라서 블록체인이 진가를 발휘하려면 그 응용 분야는 중개인 제거가 많은 혜택을 가져다 주는 경우여야 한다. 2~3배의 혜택이 아니라 국제전화 시 보이스톡처럼 10배 정도의 혜택이 있을 때 대중들은 기존 방식을 버리고 새 방식을 택한다.

기존의 문제 해결 방식을 탈중앙화된 네트워크가 제공하는 솔루션으로 대체했을 때 10배 이상의 혜택을 가져다주는 경우는 어떤 경우일까. 대부분 국경을 넘나드는 서비스를 구현할 때다. 중개인 때문에 발생하는 각종 불편함이나 비효율성은 국가가 형성한 테두리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국지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적이어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사용 사례를 만들어낸 블록체인 프로젝트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금의 필요성에 대한 글로벌 공감대를 기반으로 4천억 달러 규모의 자산이 되었다. 이더리움 네트워크는 탈중앙화 소프트웨어 운영체계의 필요성에 대한 전 세계 개발자들의 공감대를 기반으로 2천억달러 가치의 네트워크로 성장하였다. 낡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망과 각종 검열에 구속받지 않고 미 달러를 거래하고 싶은 세계 각국의 글로벌 수요 덕분에 스테이블코인 총발행량은 1천억달러를 넘었다. 사용자를 차별하지 않는 자산 거래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공간의 제한 없이 형성된 유동성 풀과 만나 코인베이스와 맞먹는 거래량을 일으키는 유니스왑이라는 탈중앙화 거래소도 좋은 예다. 이런 성공 사례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글로벌한 네트워크 효과를 달성했다는 점이다.

이는 최근 국내에서 화두인 토큰증권 시장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토큰화를 통해 기존에 증권화하지 못했던 다양한 자산들을 보다 많은 사람이 거래할 수 있게 돼 유동성이 개선된다면 자금조달 능력 개선, 투자 기회의 다양화·민주화, 가격 발견 등 많은 경제적 혜택이 따른다. 이는 지난 50년간 금융권에서 진행된 자산유동화(securitization)의 역사를 통해서 익히 증명된 사실이다. 토큰화된 자산은 중개인 없이 가치 전달이 가능한 블록체인 네트워크상에서의 거래가 가능하게 되어 잘만 실행에 옮기면 자산유동화의 경제적 혜택을 크게 확장시킬 수 있다. 문제는 '잘 이행한다'라는 부분이다. 이를 위해서는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내재된 유동성 친화적인 기능들을 살려 글로벌 네트워크 효과를 통한 유동성 극대화를 노려야 한다. 비허가성, 상호운용성, 검열저항성, 중개인 제거 등이 그러한 기능들이다.

토큰증권 활성화를 위한 규율체계 및 제반 시설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런 기능들을 살리지 못한다면 토큰증권 시장을 여는 의미가 없다. 단순히 조각투자를 증권법으로 포섭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전자증권법상 블록체인 없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큰증권'이라고 명명하며 블록체인 솔루션을 접목시킨다면 네트워크 효과를 통한 유통시장의 유동성 증대가 KPI(성과지표)가 되어야 한다. 지난 수년간 이뤄진 수많은 김치코인 프로젝트처럼 무늬만 블록체인인 시도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러한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 무늬만 공항인 비행장에 비행기는 오지 않듯이 무늬만 블록체인인 토큰증권 시장에서 유의미한 경제적 혜택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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