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글로벌 금융 체제는 1944년, 브레턴우즈 협약에서 시작되었다. 기축통화로서 미국 달러의 지위를 공식화하되 미국 달러의 공급량을 금 보유량으로 묶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 후 30년이 채 못된 1971년, 미국 달러와 금 사이의 태환제도를 미국이 일방적으로 폐지하며 기축통화는 그 발행량이 사실상 어떠한 구속도 없이 오로지 100% 미국 정부의 컨트롤에 따르는 '순수한' 법정화폐가 된다. 이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를 포함한 중동의 친미 원유 수출국에 안보를 제공하는 대가로 원유 수출을 미국 달러로 결제를 강요하는 밀월관계를 맺는다. 1970년대 중반부터 금 대신 원유를 비공식적 담보로 하는 소위 '페트로 달러' 체제가 시작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50년 된 금융 체제는 미래 세대들이 더 나은 경제활동을 영위하기에 적합한 시스템일까. 이 시스템의 혜택을 크게 본 국가도 분명 존재한다. 우리나라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좀 더 거시적으로 보면 현 금융 시스템의 혜택에서 소외된 인구수가 혜택을 받는 인구수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 세계 80억 인구 중 38개 OECD 국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20%를 밑돈다. 나머지 80%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개발도상국 국민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은행 계좌조차 보유하지 못해 제대로 된 노동시장에 참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인권 유린의 대상이 되는 가슴 아픈 상황도 발생한다. 이렇게 많은 인력이 금융 서비스에서 소외되어 글로벌 경제 네트워크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면 이는 지구촌 경제에 큰 손실이다. 현재 세계 질서하에서의 '금융 서비스'가 전 세계인들 모두에게 제공되는 공공재가 아니라 정치적 고려에 따라 일부에게만 열려있는 특혜이기 때문에 생기는 폐단이며 페트로 달러 체제하에서 모범생으로 살아온 대한민국 국민들이 잘 인식하지 못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현재 시스템의 문제는 선진국에서도 발생한다. 특히 기축통화 공급량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컨트롤하에 있어서 무분별한 통화량 증가에 대한 불안이 상시 존재한다. 레버리징과 디레버리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는 경제 사이클을 겪을 때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개입해 통화량을 조절하다 보면 어느새 연준의 본원통화는 천정부지로 높아져 있다. 물론 본원통화의 증가가 모두 통화량 증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실물 경제에 영향을 주는 '실질적' 통화량은 시중은행이 본원통화를 기반으로 창출하는 신용이기 때문에 신용에 대한 시장 수요가 있는 곳에 편중된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소위 '켄틸런 효과'이다. 신용에 대한 수요와 은행의 대출 욕구가 맞물리는 자산 시장에서 자산 매입을 위한 신용 창출이 늘어나면 이는 자산 가격 상승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메커니즘 하에서의 승자는 단연 주식이나 부동산 등을 보유한 자산가들이며 이는 빈부 격차의 중요한 원인이 된다. 반면 일정 임금을 받고 은행에 저축만 하는 노동자의 실질적인 경제권은 법정화폐의 구매력 상실로 인해 서서히 감소한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는 이를 두고 "법정화폐의 문제는 돈을 다룰 수 있는 소수에게는 득이 되지만 노동자와 저축자들을 몇 세대에 거쳐 기만한다는 점이다"라고 표현하였다.

지난달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이후 불거진 미국 중소은행들의 위기는 현재 금융 시스템의 문제점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연준은 2021년 인플레이션 압력을 '일시적(transitory)'이라고 오판한 후 뒤늦게 그 심각성을 깨닫고 짧은 기간에 역대급 금리 인상을 감행하였다. 그 부작용으로 중소은행에 뱅크런이 발생하자 연준의 재무제표를 사용하는 긴급 유동성 구제안을 발표하여 대응하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연준의 긴축 정책 끝 무렵에 금융 시스템에 이상이 발생하는 양상은 패턴화되고 있으며 그럴 때마다 매번 예외 없이 연준이 개입해 보유자산을 증가시키는 '긴급 유동성 공급(a.k.a. 머니 프린팅)'을 통해 해결하고 있다. 이것이 페트로 달러 체제의 현실이다.

사실 인류의 금융 체제가 항상 이런 것은 아니었다. 화폐 통화량을 한 주체가 컨트롤하지 않는, 중립적이고 희소성이 높은 자산에 앵커링되어 있어서 무분별한 통화량이 불가능하고 경기 과열과 침체에 일일이 중앙은행이 개입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다. 1871년부터 1910년까지 유지되었던 금본위제도가 그 예다. 물론 금본위제도에도 한계점이 존재한다. 금본위제도를 언급하는 이유는 그 당시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의 페트로 달러 시스템이 가장 논리적이고 최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열린 사고 방식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그리고 이렇게 현재 금융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 가장 성공한 가상자산인 비트코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된다.

비트코인은 현재 금융 체제의 문제 해결에 보탬이 되고자 만들어졌다. 이는 전 세계인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포함한 미래 세대들의 경제생활에 큰 영향을 미칠 중대한 사안이다. 어떠한 국가나 권력 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제한된 통화량, 중개인(은행)의 파산 걱정 없이 스스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주성, 그리고 공간의 제약이 점점 의미가 없어지는 디지털 시대에 걸맞은 자산이라는 점이 비트코인의 주요 가치제안이다. 비트코인이 기축통화가 될지 안 될지, 그건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금융 위기와 그럴 때마다 중앙은행이 개입하여 머니 프린팅으로 해결하는 현 금융 체제의 현실은 비트코인의 가치제안을 잊을만하면 다시 상기시켜준다. 비트코인의 대중화는 이렇게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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