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사이 해외 주요 언론은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그레이스케일 판결에 대해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따라 가상자산 제도권화 과정을 크게 앞당길 수 있는 비트코인 현물 상장지수펀드(ETF) 승인 가능성이 커졌다. 이 뉴스가 가상자산 산업에 왜 중요한지 파악하려면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과거 10년 동안 다양한 자산운용사들이 거의 30건의 현물 ETF 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SEC는 투자자 보호가 미흡하다는 이유로 줄곧 승인을 거부해 왔다. 최근 2년간 비트코인 선물 ETF만 승인했을 뿐이다. 거절당했던 자산운용사 중 하나인 그레이스케일은 선물 ETF는 승인하면서 현물 ETF는 거절하는 SEC의 결정은 부당하다며 SEC를 기소했고 지난 8월 미국 법원은 그레이스케일의 손을 들어줬다. SEC는 45일 안에 같은 법원에서 '전원 합의체' 항소할 권리가 있으나 마지막 날인 지난 금요일에도 신청이 접수되지 않았다.

비트코인 현물 ETF는 이미 캐나다, 유럽 등에 존재한다. 그런데도 미국 증시의 비트코인 현물 ETF 상장이 중요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미국 증시는 글로벌 자본 시장의 굵직한 축을 형성하며 사실상 전 세계 증시의 벤치마크가 된다. 둘째, 선물이 아닌 현물 기반이라는 점이다. ETF는 쉽게 말하면 기초자산 가격을 추종하는 주식이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펀드에 유입된 자금을 관련 자산에 투자해야 하며 그 대상은 기초자산 자체(현물)이거나 기초자산에서 파생된 상품(선물)일 수 있다. 그 결정 기준은 주로 설계 비용이다. 예를 들어 원유 ETF는 윈유 현물 저장비용이 크기 때문에 현물 ETF 운영은 실용적이지 않아 선물 기반으로 설계된다. 반면 금 ETF는 금괴 저장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 현물을 사용한 ETF 운영이 가능하다. 현물 ETF는 선물 ETF보다 장기 투자자에게 훨씬 적합한 특징이 있다.

혹자는 현물 ETF가 미국 증시에 상장한다고 반드시 자금이 유입될 것인지 의구심을 갖는다. 하지만 차분히 따져보면 자금 유입 가능성은 분명히 높다. 1990년대 이후 ETF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이유는 제도권 내 주식 시장이라는 틀 안에서 다양한 투자전략을 쉽게 추구할 수 있어서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부동산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富)는 약관상 제도권 내에서 정해진 틀에 따라 운영·관리되어야 한다. 일반 주식처럼 거래되는 ETF는 이러한 제약 하의 자금 운영자들에게 투자 선택권을 크게 넓혀준다. 20년 전 금 현물 ETF의 미국 증시 상장이 불러온 변화를 상기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상자산의 제도권화가 아직 초기인 만큼 제도권 내 대다수 자산운용사의 약관에는 가상자산 거래소를 통한 직접적인 비트코인 현물 투자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런 자금들에 있어 ETF는 약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비트코인이라는 신생 자산군에 대한 투자 익스포저를 쉽게 취할 수 있게 해 주는 유용한 툴이다.

아무리 장기투자자 친화적인 툴이 제공된다 해도 지금처럼 비트코인에 대한 투심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금이 유입될까. 물론 상승장이라면 자금 유입을 더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산운용의 기본적인 원칙과 선관의무에 충실한 자산운용사라면 변덕스러운 투심에 휘둘려 특정 자산군에 대한 투자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 지난 40년간 자산운용업계를 지배해 온 원칙인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에 따를 뿐이다.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에 의하면 투자 포트폴리오 대비 낮은 상관관계를 보이는 자산을 편입할수록 리스크를 높이지 않으면서 기대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해리 마코비츠는 이를 두고 '자산 다각화만이 유일하게 리스크 없이 수익률을 올리는 방법'이라고 표현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현물 ETF라는 유용한 툴을 통해 공짜 점심이 제공됐는데 이를 취하지 않는 것은 타인의 자산을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로서의 선관의무에 충실하지 않은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얘기다. 전 세계 자산운용업계의 귀감인 예일대를 비롯한 미국 명문대 기금이 5년 전부터 가상자산에 투자해 온 이유다. 예일대 기금은 장기성 기관투자자의 트렌드를 선도해 왔다. 2000년대 초 헤지펀드는 투기성이 강한 위험한 펀드라는 인식이 팽배할 때 사회적 편견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현대 포트폴리오 이론에 따라 헤지펀드의 투자를 시작한 곳이 예일대 기금이다. 당시 보수적인 대학 기금의 헤지펀드 투자는 가히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국민연금도 헤지펀드에 투자한다.

선물 기반 ETF는 기관 자금의 수요 중 극히 일부만을 충족한다. 선물 계약은 수개월마다 만기가 도래하기 때문에 선물 ETF에 투자된 자금은 정기적으로 근월물 계약으로 갈아타야 하며 이 과정에서 '롤오버 비용'이 발생한다. 이 비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축적되어 '트래킹 에러'의 원인이 되고 ETF 본연의 목적인 기초자산 추종의 장애물로 작용한다. 이러한 결점 때문에 선물 ETF에 대한 수요는 일반적으로 수개월 미만의 단기성 투자자금에 국한된다. 비트코인 선물 시장처럼 원월물 계약이 근월물 계약보다 지속적으로 높게 거래될 경우 트래킹 에러는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이미 상장된 비트코인 선물 ETF에 투자 지평선이 1~2년 이상인 '진정한' 제도권 자금은 아직 유입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이유이다.

현물 ETF 승인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은 사실이나 결코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이론상으로 SEC는 대법원에 상소할 권한이 있다. 법원 판결은 SEC가 지금까지 거절한 사유가 부당하다는 뜻이기 때문에 SEC는 새로운 이유를 내세우며 거절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특히 지난주 ETF 신청자 중 두 곳이 신청 서류를 5페이지 정도 추가하여 보완하였다고 언론은 보도하였다. SEC가 이처럼 친절하게 부족한 부분을 신청자에게 알려주고 보완할 기회를 주는 것은 승인을 긍정적으로 고려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이다. 블룸버그 ETF 전문 애널리스트가 주말 뉴스 이후 연내 비트코인 현물 ETF 승인 가능성을 90%로 올린 것도 이런 이유다.

(정석문 가상자산 거래소 코빗 리서치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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