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연초 벽걸이 달력을 새것으로 바꾸어 달 때면 새해의 운을 점치게 된다. 2024년 갑진년에는 행운이 함께 할까. 그 어느 때보다 금리인하에 대한 시장의 기대와 갈망이 크다. 지난해 10월 및 12월 두 차례의 미국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는 금융시장에 강세 심리가 자리 잡히는 계기가 되었다. 장기 시장금리가 동 회의가 끝나고 큰 폭으로 하락하였으며 하락 기조가 굳어졌다. 10월 말경 5%를 넘보던 미 국채 10년물 수익률이 두 달여 만에 3.9% 아래로 내려앉았다. 8월 이후 급등한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낙하하였다. 시장의 회의적 시각(bear)들은 견디다 못해 두 손 들었으며 인플레이션이 일시적(transitory)이라고 주장했던 진영에서는 그동안 억눌렀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인플레이션의 하락은 모두가 바라던 것이다. 또 전망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랜만의 높은 정책금리가 인플레이션을 제자리로 되돌리는 일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이다. 중동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도 유가는 오히려 하락하며 최근 물가상승률 하락에 크게 기여했다.

우려의 시각도 여전하다. 무엇보다 미국의 서비스 물가가 비주거 서비스를 중심으로 높은 오름세를 이어가고 있고 노동시장은 여전히 견조하다. 글로벌 수급에 여러 불확실성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지정학적 리스크들은 향후 유가의 높은 변동성을 배제하기 어렵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정책금리 인하(pivot) 기대가 만들어내는 큰 폭의 금융완화가 물가하락 기조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들은 지나친 신중론이고 기우일까.
좀 더 긴 시계에서 보자. 문제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인플레이션은 잠자고 있던 화산이 활동을 다시 시작하며 내뿜은 한 차례의 용암 분출이지 않을까. 글로벌 경제에 자리 잡은 큰 구조적 불균형에서 불거져 나온 하나의 뾰족한 파장이며 그 기저에 놓인 문제를 경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거의 모든 국가의 경제가 과도한 부채 누증 현상을 겪고 있다. 각 국가가 처한 상황, 경기변동의 국면 등에 따라 물가 변동의 정도와 그 국면은 다르지만 과도한 유동성 공급, 부채 누증, 자산 가격의 급등과 그 후유증을 겪고 있다. 이 작은 기고에서 그 큰 담론을 다 담을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지난 20여년 동안 금융시스템의 신용공급이 지나치게 많았으며 글로벌 경제에 큰 불안정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금융시스템에 누적된 부채들의 실질 가치가 담보되지 못할 때 시장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2008년의 시장붕괴를 우리는 생생히 기억한다. 그 후 부진한 실물경제를 뒷받침하기 위해 연준과 유럽중앙은행(ECB)은 제로 수준의 정책금리를 장기간 유지하고 엄청난 양의 유동성을 시장에 공급하여 채권시장은 초유의 마이너스 수익률을 경험했고 이로 인해 글로벌 경제의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동안 몇 번의 위기 상황에도 보강된 은행 부문의 건전성과 넘쳐나는 은행의 지급준비금자금으로 금융시스템은 신용공급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는 제로금리 및 양적완화 정책의 의도된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부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금융위기가 아닌 인플레이션으로 불거져 나왔다. 마치 풍선효과라고 할까, 과도한 유동성 및 부채 문제가 금융 부분에서 조정되지 못하고 결국 실물 부문으로 터져 나온 것은 아닐까.

이러한 스토리 라인에서 보면, 최근 시장금리의 앞선 하락은 우려스럽다. 두어 번 금리인하를 반영하는 FOMC의 경제전망요약(SEP)은 인플레이션 하락에 따른 기계적 반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언급한 FOMC에서 금리인하 논의는 다른 연준 인사의 발언을 감안해 볼 때 이러한 SEP 변화와 맥락을 같이 해 보인다. 그러나 노랜딩(no-landing)마저 전망되는 상황에서 150bp 수준의 빠른 인하 기대는 지나치다. 인플레이션의 안정적 하락 추세를 저해할 뿐만 아니라 부채조정의 기회를 망칠 수 있다.

연준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한 시점이다. 실수가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2년 전 '일시적'(transitory)인 상황이라는 입장을 고집하다 인플레이션 대응에 늦었다. 부랴부랴 달려 간신히 따라잡았고 그것에 시장은 안도했고 인플레이션은 제 궤도를 찾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고금리 장기화'(higher for longer)를 기치로 인플레이션 기대를 안착시켰다. 그리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연준이 연착륙(soft-landing)의 달콤한 유혹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1990년대의 호황은 볼커(Volker)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021년 늦봄 연준이 여전히 인플레이션에 낙관적이었고 한국은 아직 물가가 위험한 수준에까지 오르지 않은 시점에서 한국은행은 금리 인상 가능성을 내비쳤고 8월에 시작했다. 금융통화위원회는 인플레이션의 잠재된 가능성을 보면서 그 위험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고자 했다. 그 전조현상은 아파트 가격 급등과 가계부채의 급증으로 나타났다. 한국도 올해 물가상승률 하락이 전망되고 있으나 경제에 누적된 부채 문제가 심각하다. 최근 금융안정보고서는 기업부채의 지속적 증가 현상에 주목했다. 가계부채 문제에 더해 기업부채의 누증은 우리 경제의 안정적 성장 기반을 위태롭게 한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문제도 단기 위기 대응을 넘어 보다 긴 시계에서 근본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인플레이션 기저에서 작동하는 동학이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그 이면에 놓여 있는 불균형을 보아야 한다. 누적된 부채 문제를 제대로 조정해내지 못하면 경제는 성장동력을 잃게 된다. 섣부른 금리인하 기대는 문제를 어렵게 할 뿐이다.

(이승헌 숭실대 교수/ 전 한국은행 부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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