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정선영 특파원 = "진짜 심각한 인플레이션요? 영화관에서 줄을 서면 앞에 선 사람의 영화표보다 내가 사는 푯값이 더 비싸지는 일이 생깁니다. 뭐라도 빨리 사야 합니다. 망설이는 사이에 가격이 오르니까"

브라질 주재원으로 있을 때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었다는 한 국내 대형 전자기업의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오면 재화를 가진 사람이 유리합니다. 아침에 현지 통화로 환율을 적용해서 가격을 정했는데, 몇 시간 뒤에 현지 통화 가치가 20% 넘게 떨어집니다. 재협상을 해야 하는 거죠. 그런 상황이 되면 제일 눈여겨봐야 할 곳은 가격 결정력이 있는 기업, 그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쟁력이 있는 기업입니다."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이 극에 달할 때 화폐를 갖고 있으면 불리해진다. 한시라도 빨리 소비하지 않으면 가격이 올라 구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과거 인플레이션이 극심했을 때는 식료품을 사려면 리어카에 돈을 가득 실어 가야 했다고 한다. 여기서 강도가 돈이 쌓인 리어카를 훔치면 돈 대신 리어카를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최근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의 어마어마한 숫자를 보자. 아르헨티나의 지난해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160.90%를 기록했다. 이 나라의 인플레이션은 지난 1990년에는 역대 최고치인 2만262.80%였다.

인플레이션이 덮치면 식당 가격표는 수시로 고칠 수 있도록 칠판을 내걸고, 식료품 가격은 하루가 다르게 오른다. 월급을 받으면 서둘러 달려가 장을 봐야 한다고 한다. 은행에 미 달러를 예금하면 인출이 어렵다고 한다. 현지 통화 가치가 너무 낮아져 달러화를 비축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탓이다.

인플레이션이 자극을 받아 극대화되면 이렇게 무서운 상황이 펼쳐진다.


미국 슈퍼마켓에 진열된 토마토

 


이런 국가들과 비교하면 미국은 양반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2022년 9.1%까지 올랐던 인플레이션을 3%대 초반까지 낮췄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승리 선언을 하지 않았을 뿐 승자의 미소가 새어 나올 수밖에 없다.

미국의 지난해 11월 CPI는 전년대비 3.1% 올랐다. 미 연준이 주로 살펴보는 물가지수인 근원 개인소비지출(PCE) 물가지수는 전년동기대비 3.2% 올랐다. 이는 2021년 4월 이후 최저치였다.

하지만 인플레이션 좀비를 때려잡은 미 연준도 좀처럼 안심할 수 없는 모양이다.

아직 뉴욕을 비롯한 지역의 체감 물가는 상당하다.

데이터셈블리라는 시장조사기업에서 팬데믹 이후 지난해 12월까지 15만개의 기업, 200개의 소매기업 배너를 통해 식료품 가격지수를 집계한 결과 대부분의 장바구니 품목이 올랐다.

계란 가격은 2019년 이후 37.1포인트 올라 '애그플레이션(Eggflation)'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였고, 육류는 24.6포인트, 식료품 가격은 32.9포인트, 냉장식품은 28포인트 올랐다.

요즘 미국에서는 저렴한 음료로 꼽히는 콜라조차 한 박스에 월마트에서 7.88달러 수준에서 1년 만에 12.88달러로 오른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뉴왁-저지시티 도시 지역 CPI 연간 상승폭 그래프
출처: 미국 노동통계국(BLS)

 


뉴욕 인근 도시 지역 인플레이션 수치는 안정되고 있다. 미국 노동통계국(BLS)에 따르면 뉴욕, 뉴어크, 저지시티 지역을 기준으로 한 연간 인플레이션은 지난해 11월 3.0%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1월에 6.0%였던 것보다 줄었다. 전월 대비로는 0.2% 하락했는데 전월비 마이너스는 지난해 10월, 11월 딱 2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중앙은행들이 인플레이션 안정을 속단하기를 꺼리는 이유는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게 퇴치한 줄 알았는데 자꾸 되살아나는 유령이나 좀비가 무서운 것처럼 말이다.

유로존은 이미 지난해 12월 CPI가 2.9%로 반등했다. 독일 에너지 가격 기저효과가 커진 영향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해 12월 기자회견에서 미리 물가지수 반등을 예고했다.

미국의 헤드라인 CPI도 약간 오를 것으로 전망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전문가 예상치를 집계한 결과 오는 11일에 나오는 미국의 지난해 12월 CPI는 전년동월대비 3.3% 상승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는 직전월인 11월에 3.1%로 낮아진 데서 약간 오른 수준이다.

인플레이션 유령의 숨겨진 힘은 되살아나는 것이다. 이는 인플레이션 극복을 앞둔 시점에 가장 조심해야 할 변수다.

물가가 반등할 요인들을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과거 폴 볼커 전 연준 의장 시절의 두 자릿수 금리나 경기 침체가 되풀이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된다. 이는 미 연준이 제일 피하고 싶어 하는 일이다.

12월 FOMC 의사록에서도 연준 직원들은 여전히 인플레이션 상방 위험을 꼽았다.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더 지속되거나 공급 상황에 불리한 충격이 생기면 상승 쪽으로 기울 것으로 봤다.

앞으로 미국의 인플레이션에서 주목할 점은 무엇일까.

기저효과는 계속 눈길을 끌 수 있다. 특히 2023년은 물가 지표가 하락세를 보인 해다. 기저효과의 기준점도 점점 낮아진다. 물가 상승 요인이 발생하면 그만큼 전년대비 상승폭이 커질 수 있다. 특히 에너지 가격 같은 변동성이 큰 요인은 인플레이션 상승폭을 들쭉날쭉하게 할 수 있다.

주택과 서비스 물가, 임금 상승도 대표적인 항목으로 꼽히고 있다.

토머스 바킨 미국 리치먼드 연은 총재는 지난 3일 소프트랜딩(연착륙)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인플레이션 수치가 낮아졌지만 하락의 대부분이 경제 정상화에 따라 팬데믹 시대의 상품 가격 상승폭이 부분적으로 돌아온 것"이라며 "주택과 서비스 인플레이션은 역사적 수준보다 높게 유지돼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인 2%보다 높게 유지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인플레이션이 3% 안팎에서 유지되는 것으로 인식되면 더 낮아지기 어렵게 된다. 3%가 뉴노멀이 되는 셈이다.

기업들이 인플레이션과 비용 문제를 고려하면서 가격을 인상할 가능성도 열려있다. 이른바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으로 기업들의 탐욕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완화된 후에도 가격을 낮추지 않을 수도 있다. 가격은 그대로 두고, 제품의 양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도 나타난 바 있다.

미 연준의 물가 목표 2% 달성을 위한 시계가 2026년까지라는 점도 여전히 주목할 대목이다.

연준의 12월 경제전망 요약에서 헤드라인 PCE 인플레이션과 근원 PCE 인플레이션은 2026년에 2.0%로 예상되고 있다. 그나마 두 인플레이션 지표는 2025년에 각각 2.1%, 2.2%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 수준인 3%대에서 2%까지 가는 과정이 꽤 장기간이다.

물론 연준은 목표치인 2%가 되기 전에 선제적으로 정책을 전환할 계획이다. 2%가 되고 나서 움직이면 너무 늦기 때문이라고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을 포함한 당국자들은 설명했다.

이는 미 연준이 금리인하로 전환한 후에도 인플레이션이 2%까지 가는 과정이 지속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정선영 뉴욕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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