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제가 언제부터 이 회사는 내가 못 다닐 회사라고 느꼈느냐면,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넥슨의 인원이 한 30명쯤 됐을 때였던 것 같다. 조직이 커지면서 대기업병 같은 게 생긴 게 맞다. 몰라서 못 막은 게 아니고 아는데 대책이 없다". 2015년 말 출간된 『플레이』(민음사)라는 책에 담긴 넥슨 창업자 김정주 NXC 대표의 인터뷰 중 한 대목이다. 그저 게임이 좋아 창업해 성공했지만, 창의성과 효율성이라는 상충된 가치는 김정주에겐 두고두고 고민거리였다. 하지만 성장이 목표인 기업 입장에선 후자 쪽으로 무게추가 기울 수밖에 없는 법. 그런 과정에서 조직 내 갈등 또한 불거질 수밖에 없다.

그 사이 한국 게임업계 맏형인 넥슨은 지난해 매출 3조원을 달성했다. 업계 최초의 기록이다. 넥슨만 그런 게 아니다. 소위 '3N'이라는 넥슨과 엔씨소프트, 넷마블의 지난해 합산 매출은 8조원을 넘어섰다. 3N이 국내외에서 고용한 인력은 1만명을 넘어섰다. 게임에 미친 젊은 천재들이 모여 만든 조그만 게임사가 더는 아니다. 6년 전 김정주 회장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면 넥슨은 이미 숨 막힐 정도로 규모가 커진 대기업이 됐다. 엔씨소프트와 넷마블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규모가 커진다는 것은 갈등의 규모도 동시에 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은 사람과 사회와의 갈등이다. 2018년 넥슨 직원들이 게임업계 최초로 노동조합을 만든 것은 그러한 갈등이 시작됐다는 것을 의미했다. '포괄임금제'(야근이나 휴일근무수당을 포괄적으로 기본급에 산입하는 임금 체계)와 소위 '크런치 모드'(신작 출시를 앞두고 야근과 밤샘 근무를 반복하는 행태)는 게임업계 종사자들을 억누르는 폐해였다.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워라밸은 판교와 구로동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밤새 게임사 사무실의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판교 등대'라는 말이 나온 것은 게임업계가 이미 창의적 가치를 벗어나 효율성에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넥슨을 필두로 게임사들에 노조가 잇따라 생기면서 포괄임금제와 크런치 모드는 서서히 사라졌다. 그렇다고 조직 내 갈등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일한 만큼의 대가를 달라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른 직종보다 이직이 훨씬 자유로운 게임업계에서 성과에 따른 보상 문제가 터진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상체계에 대한 불공정 이슈는 '판교 등대' 이후 누적돼 온 갈등이 표면화한 것에 불과하다. 넥슨이 신입 개발자 초봉을 5천만원으로 책정하고, 직원들의 연봉을 일괄적으로 800만원 인상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게임업계의 연봉 인상 행렬은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다. 대형 게임사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1억원을 넘어섰다.

최근 벌어지는 게임업계의 이러한 연봉 인상 대열은 어찌 보면 정상적이지 않았던 보상 체계를 정상적으로 돌려놓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 게 분명하다. 크런치 모드에 억눌리면서 자신의 삶 자체를 신작 출시에 투입해야 했던 젊은 종사자들의 고생에 대한 보상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대기업병에 걸려 효율성이 압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뤄지는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조삼모사(朝三暮四)' 전략이라는 지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당장 인력 유출은 막을 수 있겠지만 새로운 크런치 모드를 위한 수순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도 있다. 우수한 인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적자를 내면서도 연봉을 올려줘야 하는 게임사들은 죽을 맛이다. 안전한 길을 선택하기 위해 창업의 꿈을 버리는 개발자들도 많아질 것이란 우려도 크다. 돈맛은 세상 어떤 것보다 중독성이 강하다. 창의성이냐 효율성이냐. 여전히 현직에서 활발하게 뛰고 있는 게임업계 창업 1세대들이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주제다. 독점을 꿈꾸다 공멸하는 수가 있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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