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태국의 바트화 위기로 시작된 동아시아 금융위기가 최고조로 치닫던 1997년 가을, 러시아에도 금융위기의 전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해외자본의 탈출이 시작되고 주가와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러시아는 결국 1년만인 1998년 8월 모라토리엄(채무상환 유예)을 선언했다.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번진 상징적 사건이다.

2022년에도 러시아의 위기는 세계 금융가를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미국과 서방의 금융제재에 맞서 러시아가 최악의 카드인 채무상환 불이행(디폴트)을 검토하고 있기 때문이다. 16일 만기가 된 국채 1억1천700만달러를 러시아가 갚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미국은 러시아에 석유와 가스 수출 금지조치를 단행해 긴장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의 금융 핵전쟁으로 비화한 우크라이나 사태 와중에 러시아의 채무상환 불이행이 현실화되면 세계 금융시장에 연쇄적인 파장을 일으킬 것으로 우려된다. 그런 측면에서 1998년 벌어진 러시아 모라토리엄 사태가 이번에도 되풀이 되지 않을까 시장은 우려하고 있다.



◆ 러시아의 팔다리 자르고 목줄까지 죄는 미국 = 러시아 경제에서 석유는 시작이자 끝이다. 러시아가 해외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의 60%가 석유다. 1998년 모라토리엄의 주요인도 석유 수출의 부진 때문이었다. 당시 국제유가 하락 때문에 석유 수출로 들어오는 달러가 급감하면서 러시아의 대외수지가 줄었고, 결국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모라토리엄까지 이르렀다.

최근 미국이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에서 퇴출한 데 이어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금지한 건 돈줄을 완전히 차단하겠다는 의도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스위프트 퇴출이 팔다리를 자른 것이라면 러시아산 석유 금수조치는 숨통을 죄는 것과 같다.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러시아의 석유 산업을 무력화시키면 러시아는 경제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되고 전시에 버틸 수 있는 시간도 그만큼 짧아진다.

그러나 국제금융시장은 그에 못지않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러시아 석유 수출이 막히는 가운데 대외채권의 잇따른 상환 불이행이 겹쳐지면 세계 금융시장에 급격한 타격을 줄 가능성이 있다. 석유공급 부족으로 인한 유가의 급등, 인플레이션의 세계화도 걱정해야 할 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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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흥국 금융위기의 전이 우려=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이 일으킨 파장은 광범위했다. 전 세계를 하나로 묶어놓은 금융시스템 때문이다.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은 이머징마켓들의 신뢰성에 치명타를 날렸고 외국인 투자자들의 이탈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 무디스와 피치, S&P 등 신용평가사들은 신용등급 강등 퍼레이드를 펼치며 공포감을 배가시켰다. 그 결과는 신흥국들의 환율과 금리, 주가 등 모든 금융변수의 괴멸이었다. 이머징마켓에 투자한 금융회사들도 대규모 손실로 타격을 입었다. 당시 미국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는 레버리지를 일으켜 러시아 국채에 투자했다가 파산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 역시 제재 대상은 러시아지만 그 여파는 러시아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러시아 자산에 투자한 유럽 등 서방의 금융회사들은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하고, 신흥국 중 경제구조가 취약한 나라들은 위기에 빠질 것으로 우려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장기화하면 경제 체력이 약한 신흥국 중에 이상 신호가 나올 수 있다. 특히 미국의 금리인상기를 맞아 글로벌 유동성도 제한된 가운데 외화자금 이탈로 환율과 금리가 골머리를 앓는 나라가 속출할 개연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 틈을 놓치지 않는 투기세력들은 나라를 넘나들며 시장을 교란시킬 개연성도 충분하다. 곡물과 금속, 석유, 가스 등 각종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는 슈퍼 스파이크 시대에 들어서면서 글로벌 경제는 점점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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