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장면1. 여의도 산업은행 본점 동관 8층에는 산은 회장실이 있다. 2013년 1월 당시 산은을 이끌던 강만수 회장과 30~40분 정도 티타임을 가질 기회가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넓은 여의도공원에는 흰 눈이 소복이 내려 장관이었다. 하지만 강 회장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새 정부가 들어서는 데 대한 긴장감이 컸던 탓으로 보였다. 정권이 교체된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 정부 최고 실세였던 그마저도 박근혜 정부로 바뀌는 데 대한 부담이 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임기 완주 의지가 강했다. 그의 임기는 무려 1년 2개월이 더 남아 있었다. 당시 여당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마당에 굳이 물러날 이유는 없다는 투였다. 한 달 후면 새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고, 새로운 인사들로 채워져 새 정부가 본격 출범하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설마 나를 그만두게 하겠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그날도 자신이 기획재정부 후배들에게 환율 정책과 관련해 훈수를 뒀고, 그게 언론에서 크게 다뤄지자 흡족해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여전히 '경제 실세'였다. 그런데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러다 조만간 쫓겨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고 한 달쯤 지난 뒤 강만수 회장은 결국 '스스로' 물러났다. 박근혜 정부 초대 금융위원장인 신제윤 위원장에게 자진 사퇴 의사를 전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인수위원회 시절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낙하산 인사가 새 정부에서는 없어져야 한다"는 박근혜 당시 당선인의 발언에 한껏 고무돼 있었지만, 결국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그의 자그마한 꿈은 무너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첫 국무회의에서 "각 부처 산하기관과 공공기관에 앞으로 인사가 많을 텐데 새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임명할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는 '지침'을 내린 후로 상황이 180도 바뀌었다. 보름 정도의 장고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자진 사퇴였다. "벌여 놓은 일들이 많아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변에서 말한다"며 우회적으로 임기 완주 의지를 보였던 그도 그렇게 무릎을 꿇었다. 강 회장이 그간 대단한 '치적'으로 내세웠던 다이렉트뱅킹에 대해 감사원이 '맹폭' 수준의 감사 결과를 내놓은 것도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스스로'가 아닌 '타의'에 의해 물러난 셈이었다. 강 회장은 수년 뒤 여러 비위 의혹에 연루돼 구속기소 됐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비위 혐의 중에는 관리 회사였던 대우조선해양 최고경영자였던 남상태 전 사장에게 압력을 넣어 바이오 회사에 44억원을 투자하게 한 것도 포함돼 있었다.



#장면2. 2015년 2월께. 대우조선해양 사장 선임을 앞두고 당시 유력한 사장 후보로 거론되던 A씨가 보자고 해 만났다. 고재호 당시 사장이 연임될 것인지, 새로운 인사가 사장이 될지를 두고 관심이 크던 때였다. A씨는 대우조선에 입사해 30년 가까이 주요 보직을 거친 인사로 사장이 돼도 큰 문제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A씨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분노에 가까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흠집 내기 위한 투서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대형 언론사에서 그 투서를 바탕으로 기사까지 내자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아니라고 설명을 해도 악의적인 기사가 나오자 법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론사에 보낼 A4 3장 분량의 내용증명까지 보여줬다. 그가 전한 대우조선 사장 선임 과정은 말 그대로 난장판이었다. 후보로 거론만 되도 죽이려는 마타도어가 난무하고, 어딘지도 알 수 없는 로비 창구들이 열려 마치 정치 선거판 같다고 한탄했다. 물론 A씨도 그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으로 추측은 했지만, 본인만은 결백하다고 항변했다. 주인 없이 십수 년 동안 공적 기관인 국책은행의 관리·감독을 받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곪을 대로 곪은 상태였다.

결국 같은 해 3월 열린 정기이사회에서 대우조선은 새로운 사장을 선임하지 못했다. 상법상 주총 2주 전까지 이사회에서 후임 사장 후보를 뽑아 추천해야 했지만, 이마저도 무산됐다. 형식상 사장추천위원회와 이사회가 사장 후보를 뽑지만, 최대 주주인 산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것을 고려할 때 산은의 결정이나 다름없었다. 산은은 당시 고재호 사장이 당분간 임시 체제로 자리를 유지한다고 밝히면서도 왜 사장 후보 추천을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대우조선 사장 자리를 두고 정권 내부 또는 정치권에서 낙하산 인사를 두고 알력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문도 들렸다. 하지만 그 이유는 불과 넉 달 뒤 드러났다. 대우조선이 2015년 1분기에 433억원의 영업적자를 냈는데 2분기에만 최대 1조원에서 3조원 가량의 적자를 볼 것으로 예상된다는 게 산은 조사 결과 파악됐다. 대우조선의 적자는 2006년 3분기 이후 8년여만에 처음이었다, 산은은 대우조선에 대한 강력한 구조조정에 착수했고, 채권단 자율협약은 물론 워크아웃까지 다각도로 검토했다. 나중에 검찰 조사로 드러난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당시 경영진이 3년여에 걸쳐 5조원에 가까운 분식회계를 저지른 것이었다. 대우조선 전·현직 경영진들은 일제히 기소됐고 실형과 함께 대규모 추징금까지 물게됐다. 분식회계는 대우조선 경영진이 한 짓이었지만, 수조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한 산은은 대우조선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몰랐다. 부행장 출신의 재무 전문가를 대우조선 최고재무책임자(CFO)로 내려 보냈지만, 한통속이 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대우조선 신임 사장 선임에 대해 정권 말 '알박기 인사'라며 강력히 반발하고, 청와대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맞서면서 신구 권력 간 인사를 둘러싼 논란이 커졌다. 대통령 선거가 열리기 이전에 이미 새 사장 선임 절차가 끝났고, 정기 주주총회에서 주주들의 표를 얻어 사장이 선임돼 사실 절차상 하자는 없다. 산은이 55.7%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주주라는 점 때문에 인수위는 사실상 현 정부의 입김이 작용한 인사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대우조선은 엄연히 민간기업이고, 사장을 선임하는 최종 권한은 대통령이 아닌 주주총회에 있다. 인수위는 대통령이 산은 회장을 임명(금융위원장의 제청)하고, 최대 주주인 산은이 대우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사장 선임과 무관하다는 청와대의 주장은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인 것 같다. 과거 산은과 대우조선이 벌여온 일들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다. 아무리 현 정부 들어 이전 정부와는 다른 시스템으로 운영을 해 왔다 치더라도 의심은 해 볼 수 있다. 물론 민간기업 대우조선의 경영진 선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꺼내놓는 인수위도 온당치 않다.

결국 인수위가 타깃으로 삼은 것은 대우조선이었을까, 산은이었을까. 인수위가 굳이 논란이 벌어질 것을 뻔히 알면서도 대우조선을 공격의 대상으로 꼽은 것은 오히려 산은 때문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산은 회장 자리를 두고 도발한 것이라는 것이다. 현 정부에서 임명된 이동걸 산은 회장은 지난해 연임에 성공해 임기가 한참 남았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더라도 대놓고 나가라고 할 수가 없다. 이 회장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는 한. 사실 여당이 되는 현 야당에 이동걸 회장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이 회장은 2020년 9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전 대표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이 전 대표의 '집권 20년론'을 거론하면서 '가자, 20년'이라는 건배사를 제안한 것을 두고 입길에 올랐다.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금융 공공기관장으로서 처신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산은은 지난해에만 83조원이 넘는 자금을 금융권과 산업계에 공급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곳이다. 정부의 금융정책을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최전선에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산은 회장 자리의 무게와 비중을 크게 둔다. 이번 '대우조선 사장 논란'도 그런 연장선에서 벌어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5월 10일 새 정부가 본격 출범한 이후에도 산은 회장 자리를 둘러싼 잡음은 이어질 공산이 크다. 결과는 어찌 될까. 임기를 보장하던지, 자진해 물러나던지 두 개의 시나리오를 빼고는 답이 없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계속되는 산은 흑역사(더 넓게 보면 대우조선 잔혹사까지)는 언제쯤 끝날까.

(기업금융부장)



※쿰파니스는 라틴어로 '함께(cum)'와 '빵(panis)'이 합쳐진 말로 동료나 친구를 뜻하는 컴패니언(Companion),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pisces738@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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