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과거 이명박 정부 때의 일이다. 새해 벽두 대한상공회의소는 강남 코엑스에서 어김없이 대규모로 기업인 신년 인사회를 열었다. 대통령은 물론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정·재계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은 거의 빠짐없이 참석할 정도로 큰 행사였다.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표방하면서 출범한 이명박 정부에 대한 기업인들의 기대는 컸다. 작은 정부를 표방하면서 민간 주도로 성장을 이끌고, 사회 전반의 '반기업 정서'도 깨겠다는 게 당시 정부의 목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대통령이 신년 축사를 마치고 퇴장하면, 수백 명의 정·재계 인사들은 차 한잔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인사하기 바쁘다. 당시 현장에서 취재하던 후배 기자에게 보고가 들어왔다.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정부 고위관계자 A씨와 B씨가 나누던 얘기를 살짝 엿들은 내용이었다. 현장 상황이 어수선해 정확한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들이 내뱉은 말은 좀 충격적이었다. "X(임의의 명칭) 그룹 참 말 안 듣네요. 손 좀 봐야 될 것 같은데요". 옆에 기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 그들의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조금 전까지 대통령은 기업인들을 격려하고 있었다. 하지만 같은 장소에서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X그룹은 어찌 됐을까. 인과관계를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좀 고생했다.

2주 뒤면 '친기업·민간 주도'를 표방하는 윤석열 정부가 공식 출범한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달 6개 경제단체 수장들과 도시락 점심 간담회를 했다. 당선된 지 12일 만이었다. 윤당선인은 "기업이 더 자유롭게 판단하고 자유롭게 투자하고 성장할 수 있게 제도적 방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정부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기업이 주도해 성장을 이끌 수 있도록 규제철폐 등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공무원들이 말도 안 되는 규제를 하고, 갑질을 하면 언제든 자신에게 전화하라고 했다. 핫라인을 통해 직접 소통하자는 얘기였다.

그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한마디가 있었다. "공정한 룰 속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 사실 윤 당선인에게 '공정과 경쟁'이라는 화두는 새로울 게 없다. 2019년 7월로 돌아가 보자. 검찰총장으로 취임하면서 한 일성이 바로 '공정한 경쟁 질서'였다. 당시 대검찰청은 당시 윤 총장의 발언에 "검사 인생과 철학이 반영됐다"는 이례적인 설명자료까지 냈다. 그러면서 시장의 룰이 깨지면 모든 것이 무너지는 만큼 룰을 위반하는 반칙행위를 묵과할 수 없다고도 했다. 당시 윤 총장의 이러한 발언은 기업들을 긴장하게 했다.

사실 '공정한 경쟁'이라는 주제는 시장경제를 채택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자본주의와 등치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규제 또는 사정(司正) 정도로 해석되곤 한다. 기업들이 '친기업·민간 주도'라는 말을 반기면서도 경계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반칙'을 제어할 수 있는 정부의 공권력 중 기업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대상이 바로 검찰과 공정거래위원회다. 특히 기업들의 거의 모든 영업행위와 지배구조는 물론 인수·합병(M&A)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감시하고 제재를 하는 공정위는 기업들에 공포의 대상이다. 그래서 '경제검찰'로 불린다. 공정위의 제재를 받고, 검찰에 고발까지 당하게 된다면 기업들은 '멘붕'에 빠진다.

윤석열 정부의 초대 공정거래위원장을 두고 검찰 출신이 임명될 수도 있다는 하마평이 나온다. 일부 구체적인 인사의 이름이 회자하기도 한다. 검찰과 공정위는 사실 오랫동안 영역을 두고 물밑싸움을 벌여왔다. 그만큼 그 권한과 힘이 막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상황에서 공정거래위원장에 검찰 출신이 처음으로 임명된다면. 기업들이 받아들이는 인사의 시그널은 분명할 것이다. 더군다나 검찰을 관장하는 법무부 장관 후보자에 윤 당선인의 최측근인 한동훈 전 검사장이 내정된 상태다. 기업부패 수사의 '칼잡이'이자 서울중앙지검의 초대 공정거래조사부장을 지낸 인물이다. 기업과 기업인들은 자신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사회적 분위기를 못 견뎌 한다. 경영이나 영업행위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처벌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손 한번 봐야겠네"라는 자세로 기업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다. 공정한 경쟁을 해치는 기업을 처벌하는 데 방점을 두기 보다는 경쟁을 더욱 촉진할 수 있도록 이끄는 리더십을 갖춘 공정거래위원장이 필요해 보인다.

(기업금융부장)

pisces738@yna.co.kr



※쿰파니스는 라틴어로 '함께(cum)'와 '빵(panis)'이 합쳐진 말로 동료나 친구를 뜻하는 컴패니언(Companion),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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