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지난 6월 말 미국의 블룸버그통신은 테슬라와 현대차와 관련한 재미있는 기사를 냈다. 제목은 'Sorry Elon Musk. Hyundai is quietly dominating the EV race'였다. '미안해요. 일론 머스크, 현대차가 조용히 전기차 시장을 지배하고 있어요'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기사였다. 일론 머스크의 테슬라는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무려 75.8%의 점유율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2위는 현대차이지만, 점유율은 9%에 불과하다. 3위 폭스바겐(4.6%), 4위 포드(4.5%) 등과 비교하면 현대차의 점유율은 높은 편이지만, 테슬라에 비할 바는 못 된다. 하지만 기사의 주인공은 테슬라가 아닌 현대차였다.

미국의 유력매체인 불룸버그통신이 갑자기 테슬라를 저격하고 현대차를 높이 평가한 이유는 뭘까. 기사 제목처럼 현대차가 미국 시장에서 조용하면서도 빠르게 전기차 시장을 잠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가 출시한 아이오닉 5, 기아가 내놓은 EV6는 올해 초 출시 이후 5월 말까지 미국 시장에서 2만 대 넘게 팔렸다. 이러한 판매 규모는 테슬라가 무려 10년이나 걸려 세운 기록이라는 게 블룸버그통신의 분석이었다. 일론 머스크조차도 지난 6월 자신의 트위터 친구의 게시물에 "현대차가 참 잘하고 있다"(Hyundai is doing pretty well)라고 댓글을 달 정도였다. 2018년 현대차가 전기차 모델을 홍보하면서 일론 머스크를 향해 "이제 당신 차례야. 일론"이라고 '도발'했던 것을 고려하면 매우 빠른 시간에 성장세를 보인 셈이다.

자국 자동차 업체 키우기에 집중하는 중국에서 쓰라린 맛을 봤던 현대차는 '미래 모빌리티' 전략을 토대로 전기차와 수소차로의 모델 포트폴리오 변화를 통해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공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난 5월 말 방한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앞에서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무려 105억달러(약 13조4천억원)에 달하는 대규모 미국 투자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미국 조지아주에 6조3천억원을 들여 미국 내 첫 전기차 공장과 배터리셀 공장을 짓기로 했다. 로보틱스와 도심항공모빌리티(UAM), 자율주행, 인공지능(AI)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도 2025년까지 50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계획을 바이든에게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정의선 회장과의 독대에서 바이든은 연신 "땡큐"(Thank you)를 연발했다. "많이 도와주겠다"라고도 했다. 대규모 투자로 현대차의 미국 공략은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과 석 달 만에 현대차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됐다. 일각에서는 "바이든이 제대로 현대차를 엿 먹였다"라는 말까지 한다. 엄청난 선물 보따리를 풀어놨는데 전기차 판매 길을 사실상 막아놓으면서 현대차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다는 것이다. 지난 12일 미 하원을 통과하고, 16일 바이든 대통령이 서명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때문이다. 사회안전망 강화와 기후·에너지 대응 등에 무려 4천370억달러를 지원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법안은 사실상 '현대차 고사법'과 다름없다. 미국과 멕시코 등 북미 지역에서만 최종적으로 조립된 전기차만 보조금을 주겠다는 게 법안에 담겼다. 현대차가 미국에서 판매하는 아이오닉 5와 EV6는 모두 한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미정부가 지원하는 1천만원 상당의 보조금을 받을 수 없는 셈이다. 전기차는 일반 내연기관 차보다 가격이 높아 정부 보조금 지원 여부가 판매에 큰 영향을 준다.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그만큼 가격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현대차는 말 그대로 폭탄을 맞은 셈이다.

현대차가 이에 대응할 방법은 미국에 전기차 공장을 빨리 짓는 것인데, 미국 조지아주에 만들기로 한 공장은 2025년 상반기나 돼야 가동이 된다. 현대차는 일정을 반년 정도 앞당겨 2024년 말에 양산 체제를 갖추는 것을 검토하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2년 반이 넘는 기간 동안 마땅한 대응책은 없다. 부랴부랴 정의선 회장이 미국 출장길에 올라 현지에서 대응책을 모색할 예정이지만, 힘에 부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이미 미국 대통령이 법안 서명까지 마치고 발효된 마당에 개별 기업이 미정부를 상대로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싶다. 보조금을 받게 된 테슬라나 GM 등 경쟁사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이번 사태를 보면서 과연 정부는 뭘 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인플레 감축법이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바이든 정부는 전기차에 대한 차별적인 인센티브를 부여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지난해 이후 꾸준히 추진해 왔다. 인플레 감축법안이 지난달 말에야 급작스럽게 공개되고 의회에서 전격적으로 처리된 측면도 있지만, 사실상 방향성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정부도 여러 경로로 우리의 입장을 전달했겠지만, 좀 더 치밀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은 지적을 받아야 한다.

미국 행정부와 의회가 있는 워싱턴DC는 거대한 로비의 장(場)이자 각국 정부의 아웃리치(outreach)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지는 곳이다. 미국 의회에서 통과하는 각종 경제·산업·통상법안들은 미국 내에서만 통용되는 것이 아닌 전 세계 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들이 상당한 비용 부담을 감수하고 로비스트를 고용해 자신들의 입장이 법안에 담기도록 하는 활동은 일상화돼 있을 정도다. 워싱턴DC의 주미대사관에 파견된 소수의 재경·산업·통상 관료들만으로 감당이 안 되는 일들이다. 미중간 통상전쟁이 지속하고, 글로벌 공급망 문제가 수년째 확산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현지 대응 전략은 여전히 나이브하다. 언제 결과가 나올지도 모르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검토 같은 뒷북 대응을 여전히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우리 기업들은 죽어 나간다. 이제라도 워싱턴DC든 베이징이든 대규모 통상 전담 헤드쿼터를 두고 현지에서 직접 챙겨야 한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있다 뒤통수를 맞아선 안 된다. 앞으로도 제2의 현대차가 나올 수 있다. 기업들에만 맡겨서야 하겠는가. 설마 그런 것도 '민간주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각자도생의 길로 떠밀어 넣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 아니다.



(기업금융부장)

pisces738@yna.co.kr



※쿰파니스는 라틴어로 '함께(cum)'와 '빵(panis)'이 합쳐진 말로 동료나 친구를 뜻하는 컴패니언(Companion), 기업을 뜻하는 컴퍼니(Company)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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