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피혜림 기자 = 신종자본증권의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흥국생명이 이를 스스로 철회하기까지 상황은 숨 가빴다.

흥국생명이 '자의 반 타의 반' 콜옵션 행사 여부를 번복하게 만든 유례없는 상황을 두고 시장에선 여전히 금융당국을 향한 아쉬움을 쏟아내고 있다.

8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전일 흥국생명은 싱가포르 거래소를 통해 이달 9일 돌아오는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을 행사하겠다고 공시했다. 지난 1일 콜옵션 미행사를 선언한 지 엿새 만의 일이다.

흥국생명은 자체 유동성과 국내 금융기관의 지원을 통해 약 8천억 원 수준의 유동성을 확보했다. 주요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은 이날 4천억 원을 웃도는 흥국생명 환매조건부채권(RP)을 사들일 예정이다. (연합인포맥스가 7일 송고한 '흥국생명, 5억 弗 영구채 상환한다…시중은행 내일 RP 매입' 제하의 기사 참고)
조용하던 대주주 태광[003240]도 자구책을 내놨다.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흥국생명에 대해 자본확충을 하기로 했다.

8천억 원의 유동성 중 5천600억 원가량은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을 상환하는 데 쓰인다. 현재 환율대로라면 상환 규모가 7천억 원에 육박하지만, 환 헤지 덕에 규모가 다소 줄었다. 나머지 유동성은 이번 상환으로 떨어지는 지급여력비율(RBC)을 보강하는 데 활용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없었다면 일주일 만에 8천억 원 규모의 유동성을 마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흥국생명의 콜옵션과 관련해 시스템적으로 사전 개입은 쉽지 않다며 선을 그었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시장 참가자는 없다.

흥국생명 콜옵션 미행사는 정부 윗선에 보고될 정도로 큰 사안이었다고 한다. 예상보다 한국물 시장(코리아 페이퍼·KP)에 미치는 파장이 커서다. 금융당국도 바삐 움직였다. 지난 주말에도 금융당국은 흥국생명의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지켜봤다.

외화 신종자본증권의 발행은 물론 콜옵션 행사를 스스로 포기하는 과정은 금융당국은 물론 기획재정부와의 사전 협의가 필요한 일이다.

시장에서는 흥국생명 쇼크를 개별 회사의 크레딧 이슈가 아닌 규제의 이슈라고 입을 모은다.

금융당국은 지난 2일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이행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언급하며 이들의 수익성에 문제가 없음을 강조했다. 조기 상환과 자금 상황, 해외 채권 차환 발행을 여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선택이라는 게 금융당국의 설명이었다.

예상치 못한 금융당국의 메시지에 시장은 당황했다.

한 채권시장 관계자는 "파장이 생각보다 크다 보니 안정을 위한 메시지가 필요했던 것 같다"며 "하지만 앞으로 제2, 제3의 흥국이 나온다면 금융당국이 그때마다 이들의 건전성을 증명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흥국생명에 경제적 유인은 분명했다. 콜옵션 행사를 포기하는 대신 스텝 업 조항에 따라 투자자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금리는 7% 남짓에 불과했다. 그 시기 차환 발행을 위해선 최소 10~12% 수준의 발행 금리가 뒷받침돼야 했다.

문제는 금융당국이 요구하는 회계적인 자본이다. 2조 원 규모의 자본을 보유한 흥국생명이 6천억 원을 조달자본으로 사용하면 RBC는 폭락할 수밖에 없다. 흥국생명의 RBC는 지난 6월 기준 157%로 금융당국의 권고치(150%)를 가까스로 유지하는 수준이다. 올해 3분기 들어 시장 금리가 더 오른 점을 고려하면 법상 규제 수준인 100%를 방어하는 것도 녹록지 않았을 게 뻔하다.

하지만 유효기간이 두 달 남은 RBC를 위한 흥국생명의 선택은 시장을 흔들었다.

최근 보험사들의 RBC 급락은 한시적인 현상이다. 이는 금융당국도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RBC의 모순은 명확하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보험사는 금리가 오르면 수혜를 입는 곳인데 RBC는 떨어진다. 제도적 모순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를 고쳐 킥스를 반영하기로 한 것"이라며 "시한부 RBC를 위해 흥국생명이 한 선택은 경제적 유인보단 감독 당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눈치 보기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보험업 감독규정에는 유동성을 유지하고자 은행으로부터의 당좌 차월과 RP 매도를 인정하고 있다. 2020년부터는 한국은행으로부터의 차입도 가능해졌다.

또 다른 보험사 관계자는 "애초에 금융당국이 보험업법상 있는 차입 규정 등을 활용해 우선 상환을 독려했으면 어떨까 싶다"며 "최근 몇 년 새 보험사들이 앞다퉈 자본증권 발행에 나선 것을 고려하면 차환 이슈도 대비했어야 했다. 개별사의 책임이 우선이지만, 이에 대한 제도적 정비도 필요했던 셈"이라고 꼬집었다.

물론 대주주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렵던 흥국생명이 자본을 확충할 수 있게 된 데는 금융당국의 덕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 원장은 전일 외신기자간담회에서 단기 성과에 집착해 선제적 리스크 관리를 소홀히 한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그 책임에 따른 조치를 병행하겠다고 경고했다.

흥국생명은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분 56.3%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대한화섬과 티엔알 등 태광그룹 계열사들도 일부 지분을 갖고 있지만, 대주주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게 그동안의 상황이다. 이 전 회장 개인의 지분율이 큰 데다, 사법 리스크를 둘러싼 여파로 그가 자회사 경영에 참여하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태광그룹이 이례적으로 흥국생명 자본확충을 예고하고 나선 것은 자구책 마련을 요구하는 금융당국 안팎의 목소리가 반영된 게 아니겠느냐는 게 관련 업계의 중론이다.

이번 흥국생명 사태로 시장에선 당국의 '애니멀 스피릿(동물적 감각)'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채권시장 관계자는 "최근 시장 상황은 금융당국을 포함해 누구에게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며 "적절한 타이밍과 명확한 가이드라인만이 시장 혼란을 최소화할 수 있다. 지금의 금융당국은 너무 늦다"고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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