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정선영 특파원 = 미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모임을 하고 더치 페이를 하면서 처음으로 벤모라는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했다.

"I venmo you. (벤모로 돈을 보낼게)"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유명한 송금 앱이다. 은행 계좌와 연결하고 바로 송금이 가능해서 저녁 비용을 나눠서 내기에 딱 좋았다.

그날 이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친구가 누구와 밥값이나 모임을 한 비용을 나눠서 냈는지 다른 사람의 결제내역이 뜨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친구 A가 B(모르는 사람)에게 50.00달러를 보냈다는 식이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결제 내역이 보여서 처음에는 고장인 줄 알았다. 나중에 사정을 알고 나니 충격적이었다.

연합뉴스 자료 사진

 



벤모는 은행 송금이 즉시 이뤄지지 않는 미국에서 즉시 소액을 송금할 수 있는 서비스로 인기를 모았다.

동시에 이 앱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니 바로 '결제 내역 공유'였다. 친구들과 일상을 공유하는 SNS처럼 결제 내역을 공유하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대체 무엇을 위해 공유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앱의 특징이라고 한다. 결제 내역 공유 때문에 누가 누구랑 밥을 먹었는지, 어디에 놀러 갔는지 알게 돼 도리어 인간관계를 더 외롭게 한다는 평가도 나온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런 앱이 편리하게 이용되는 것은 바로바로 처리되지 않는 미국 결제 시스템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미국에서 결제를 하다보면 은행 계좌에 돈이 있어도 'Pending(결제 보류)' 내역이 뜬 후에 최종 결제가 이뤄진다. 신용카드를 쓰면 결제 내역에 바로 반영되지 않고,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 간에 업무가 처리될 때까지 잠시 보류됐다 처리된다. 계좌이체를 하는 경우에도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 보니 일상적으로 소액을 송금할 때는 벤모나 체이스은행의 젤(Zelle), 페이팔과 같은 즉시 송금 서비스가 활발하게 이용된다. 애플페이나 구글페이와 같은 결제 서비스도 애용된다.

동시에 사람들은 여전히 옛날처럼 수표(Check)책을 사용해 수표에 직접 금액과 서명을 해서 지불하기도 한다. 개인이 수표를 쓰는 일은 아직도 미국에서 흔하게 사용되는 방식이다. 학교나 학원에 비용을 지불할 때나 공과금을 내는 등 현금 대신 돈을 내야 할 때 주로 사용한다.

수표를 쓸 때 수취인란에 이름을 쓰지 않고 'Cash'를 써서 바로 출금이 가능하도록 쓰는 경우도 있다.

결제 면에서 과거와 현재의 방식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인증서의 벽이 두텁지만 대부분의 결제가 실시간으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이뤄지는 한국과 다른 점이다.

미국 비현금 결제 현황
출처: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 자료

 




지난해 7월부터는 미국도 즉시 결제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페드나우(FedNow)라는 즉시 결제 시스템을 시행했다.

지난해 7월에는 35개 참여기관을 대상으로 출시됐고, 지금은 약 331개 기관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은행이나 금융기관들은 이 시스템을 활용하면서 소액 예금이나 대출금의 입금, 보험 청구에 대한 즉시 지불, 급여 이체 등이 즉시 이뤄질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세인트루이스 연은은 미국 결제 시스템의 진화를 주제로 새로운 변화에 대해 상세히 알렸다.

예를 들어 자동차 보험료 납부 기한 마지막 날 자정에 납부가 안되면 보험이 취소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경우를 가정했다. 페드나우 시스템을 활용하면 몇 초 만에 금액이 보험회사 계좌로 입금, 기록되므로 보험이 문제없이 유지된다.

별도의 앱으로 하지 않아도 은행이나 금융기관에서 즉시 결제를 바로 할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연준은 페드나우 이용 기관들의 후기도 공개하고 있다.

부동산 거래나 자동차 매매에서도 즉시 결제가 가능해지면서 결제 기간 동안 발생하는 사기를 줄이고, 일요일에도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미 연준은 이 시스템이 경제에 현금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며, 디지털 통화를 위한 것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자금 거래를 위한 또 하나의 옵션이라고 연준은 강조했다.

분명한 것은 미 연준의 이 시스템으로 미국 내에서 돈이 결제되는 속도가 더 빨라지게 됐다는 점이다.

하지만 빨라졌다는 사실 때문에 금융시장 일각에서는 걱정도 불거졌다.

뱅크런(현금 대량 인출 사태) 속도가 더욱 빨라질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금융시장에 깔려있다.

지난해 3월에 일어난 실리콘밸리은행(SVB)이 파산은 사상 초유의 빠른 속도로 이뤄졌다. 불과 하루 만에 예금이 420억달러가 빠져나갔고, 이튿날 바로 1천억달러가 추가 인출된 것으로 전해졌다.

휴대폰만 있어도 되기 때문에 은행 앞에 출금을 위해 긴 줄이 생기는 일도 거의 없었다.

SNS를 통한 정보 공유와 즉시 출금이 가능한 애플리케이션의 결합은 뱅크런 속도를 가속화했다.

과거에는 뱅크런이 발생하면 출금이 이뤄지는데 10일 이상 걸렸지만 요즘 은행들이 뱅크런 조짐을 겪게 되면 불과 이틀도 안 돼 자금이 우수수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미국 지역은행들의 상업용 부동산 리스크는 아직 안심할 수 없는 부분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블로그에서 모기지은행협회(MBA) 자료를 인용해 미국 상업용 부동산 부채 중 약 1조2천억달러가 향후 2년 내 만기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소규모 미국 지역은행들이 대형은행들보다 이 부문에 거의 5배 정도 더 많이 노출돼 있어 취약하다"고 지적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도 최근 미국의 일부 지역 은행들을 대상으로 상업용 부동산 관련 대출에 대한 위험 노출액을 제출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SVB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경우 예금 인출 속도가 훨씬 빠를 수 있고, 지역은행의 경우 이같은 상황에서 버티기 어려울 수 있다.

이에 페드나우가 도입된 후에도 금융시장에서 불거진 이런 우려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비단 미국 금융기관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SNS와 은행 즉시 결제서비스의 결합은 예상치 못한 비상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유럽중앙은행(ECB)도 일부 은행이 뱅크런의 초기 징후가 있는지 SNS를 살펴볼 것을 요구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바 있다.

각국의 금융당국이 빨라진 뱅크런 속도를 의식하며 점검을 지속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ECB는 지난해 11월 금융안정 리뷰에서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정보가 더 빠르게 확산할 수 있지만 충격을 유발하거나 증폭시킬 수 있다"며 "2023년 3월 미국 은행권의 긴장은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의 부정적인 심리가 실리콘밸리은행의 경우처럼 주가나 예금 유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고 언급한 바 있다.

ECB는 "디지털화 덕분에 많은 개인 투자자들이 금융 시장에 참여하고 있다"면서도 "실리콘밸리 은행의 사례는 디지털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은행 경영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에 "지점 밖에 줄을 서는 예금자는 거의 없었다"며 "대신 그들은 은행 앱과 전화 통화를 사용해 몇 분 안에 돈에 접근했다"고 설명했다.

결제 속도가 빨라지고, SNS로 서로 연결된 사회의 새로운 부작용을 지난해 제대로 경험한 금융시장은 더욱 신중해져야 하는 시점이 됐다. (정선영 뉴욕 특파원)

syj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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