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인포맥스) ◇2024년 3월. 미국의 트레이더조라는 한 슈퍼마켓에서는 때아닌 가방 전쟁이 벌어졌다. 장바구니 상품으로 나온 2.99달러짜리 미니백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품절사태가 일었다.

남색, 초록, 빨강, 노랑으로 나온 도시락 가방 크기의 작은 백은 며칠 만에 인기상품으로 떠올랐다.

미니백에 대해 묻자 한 트레이더조 직원은 "다른 색은 다 솔드아웃이에요. 내년에 들어온대요"라며 놀라워했다.

한 번에 800달러 어치(약 260여개) 주문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 3달러짜리를 해외에서 20달러에 판다고 했다.

사흘 후, 트레이더조를 다시 방문하니 가방은 이미 매진이었다.

또 다른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 "5일 동안 하루에 2천개 정도 팔았어요. 이제 솔드아웃이라 내년 쯤 들어올 텐데 9월쯤에 다시 들여올지 의논하고 있어요" 그리고는 자신은 6개 정도 샀다며 무슨 색깔을 샀냐고 물었다.

인플레이션이 휩쓸고 지나간 미국의 슈퍼마켓에선 이제 높아진 가격은 일상이 됐다.

미국내 다른 마트들에 비해 그나마 저렴하게 식품들을 파는 트레이더조는 지난 2023년 가을에 냉동 김밥 매진 사태가 일어난 곳이다. 소셜미디어에서 주목받으면서 김밥을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섰는데 당시 김밥의 인기 비결은 '맛도 좋고 훌륭한 가성비'였다.


◇바다 건너 일본 슈퍼마켓은 사정이 어떨까.

2024년 2월. 연인에게 초콜릿을 주는 발렌타인데이. 일본 도쿄에서는 '기한이 임박한' 초콜릿이 매진됐다고 한다.

계절 상품이나 유통 기한이 임박한 상품 등을 최대 90% 이상 할인해서 파는 푸드쉐어링 플랫폼인 쿠라다시는 도쿄 미드타운에 초콜릿 팝업 스토어를 열었다.

보통 발렌타인데이를 위한 초콜릿 상품은 2월 14일이 지나면 잘 팔리지 않는다. 쿠라다시는 2월 25일까지 초콜릿과 젤라토 세트를 약 800엔~1천430엔 정도에 팔았다.

쿠라다시의 상점은 총 3만2천69개의 초콜릿 세트를 팔았다고 한 일본 매체는 보도했다. 영업 종료 전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일본 슈퍼마켓에서는 기한 만료를 앞둔 식품을 구입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은 식품에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기간인 소비기한과 개봉하지 않으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기한인 '상미 기한'으로 나눠서 표시한다.

대부분의 식품은 '상미 기한'이 만료돼도 얼마 동안 먹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저렴하게 파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2023년 12월에 도쿄의 에콜로 마르쉐라는 슈퍼마켓에서 '기간 만료'라고 적힌 상품들의 판매가 1년 전보다 1.3배 증가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인플레이션을 대하는 소비자들의 태도는 약간 온도차가 있다.

저렴하고 좋은 상품이 나오면 매진 사태가 일어나는 것은 비슷하다.

하지만 슈퍼마켓에서 식품이 아니라 가방이 동나는 사태는 약간 이례적이다. '소비의 대가'인 미국 사람들은 여전히 '가성비 좋은 상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일본의 소비자들은 식품 가격에 고민하면서 조심스러운 소비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은행은 경제활동의 리스크 요인으로 '기업과 가계의 신중한 소비 태도로 투자와 민간 소비가 기준 시나리오에서 하향 이탈하는 것'을 꼽았다.

임금 인상이 제한되면 가계의 방어적 소비 태도가 더 강화돼 경기가 침체되는 반면 곡물을 비롯한 원자재 가격이 하락하면 경제가 상승할 수 있다고 일본은행은 봤다.

인플레이션 지표 역시 약간 다르다.

미국 인플레이션은 지난 2022년 6월에 9.1%로 최고점을 찍고 3.2%로 내려온 상태다.

임금상승세가 약간 하락했지만 주거비 인플레이션은 낮아지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인플레이션 하락세는 정체된 양상을 보였다.

2024년 1월에 일본은행이 내놓은 경제 및 물가정세 전망에 따르면 일본의 신선식품을 제외한 모든 항목에 대한 인플레이션은 최근 2.0~2.5%대를 보이고 있다. 2023년 한때 4%를 웃돌았던 수준에서 내려온 상태다.

하지만 임금 상승률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는 큰 요인으로 꼽혔다.

일본 최대 노조 조직인 렌고(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가 올해 일본의 평균 임금 인상률 예비치를 5.28%로 집계했다.

일본의 임금 인상률이 5%를 웃돈 것은 1991년 이후 30여 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미국과 일본 통화정책은 인플레이션 속에서 정반대의 경로를 걸어왔지만 이번주에 새로운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주요국 긴축 행렬 속에서 나홀로 마이너스금리를 고수하던 일본은행이 드디어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

일본은행은 높은 인플레이션에 대응해 마이너스금리에서 벗어나는 '금리 인상' 카드를 잡고 있다.

일본 경제지인 니혼게이자이는 일본은행이 오는 19일 통화정책회의에서 마이너스(-) 0.1%인 현행 단기금리를 0~0.1% 범위로 인상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일본은행의 마이너스금리 종료는 역사적인 변화지만 시장 참가자들은 10bp의 인상폭에는 다소 시큰둥하다. 수십년의 저금리에서 벗어나는 액션치고는 강도 높은 변화는 아니라 할 수 있다.

일본 경제가 아직 강한 동력을 찾지 못한 영향도 크다.

일본은행은 일본의 실질 GDP는 지난해 4~6월 분기에 3분기 연속 증가해 전분기보다 0.9%, 연간 기준 3.6%를 기록했으나 7~9월 분기에는 분기 기준 -0.7%, 연간 기준 -2.9%를 기록했다고 집계했다.

이와 달리 미국은 강한 경제성장률과 3%대의 인플레이션을 나타내고 있다.

지난해 4분기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3.3%였고, 올 1분기에도 2%대 중후반 성장률이 예상되고 있다.

일본과 반대로 '금리인하' 카드를 든 미 연준도 그리 편하지는 않다.

공격적인 긴축 이후 올해 3회 금리인하를 시작하겠다고 했는데 경제가 예상보다 강해 인하 시점이 애매해졌기 때문이다.

시장 전문가들은 이번주 3월 FOMC에서 연준이 3회 인하에서 2회 인하로 횟수를 줄이고, 성장률 전망치를 상향 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 12월 경제전망 요약에서 미 연준은 올해 연방기금 금리가 4.6%까지 낮아지고, 2025년에는 3.6%, 2026년에는 2.9%까지 낮아질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현 수준인 5.25~5.50%에서 2회 인하에 그치면 올해 말에 금리가 5%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연방기금 금리가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없이 잠재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는 중립금리 수준까지 낮아지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샌프란시스코 연은의 브리짓 로스 트란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7일 페드뷰 보고서에서 "최근의 변화는 경제 연착륙을 지지하고 있다"며 "현재 통화정책의 제약적 스탠스를 고려할 때 실질 GDP 성장은 연은 추정치인 1.7%를 향해 둔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연방기금 금리는 중립금리 추정치인 2.75%를 크게 웃도는 수준으로, 경제 활동을 억제하고, 인플레이션 2%를 향한 점진적인 하락세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립금리가 목표 금리는 아니지만, 단순 계산했을 때 트란 수석 이코노미스트가 제시한 중립금리 추정치 2.75bp까지는 무려 275bp가 남았다.

만약 연준이 올해 2회 인하하면 연말에 4.75~5.00%에 도달한다. 연준은 보통 연 8회 금리 결정을 한다.

미 연준이 2025년에 8회 쉬지 않고 25bp씩 인하해도 중립금리 근처에 갈까 말까다.

이처럼 미국과 일본의 경제 상황은 온도차를 보이고 있지만 양국 모두 올해 정책 전환과 깜빡이 신호를 더 분명히 할 시점이 됐다. (정선영 뉴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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