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자산시장이 맥을 못 추고 있다. 지난 5월은 가격이 36% 이상 하락하여 최근 10년간 최대 낙폭을 보였다. 하필 이럴 때 튀어나와 가상자산에 관하여 부정적인 말을 보태는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기회주의적 태도일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이야말로 가상자산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황금 같은 시간이기도 하다. 투자 열풍이 한창일 때는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가상자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착각이 있다. 그것이 화폐라는 착각과 분산원장 때문에 안전하다는 착각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둘 다 틀렸으며, 그런 착각이 널리 전파된 데는 경제학자와 컴퓨터 엔지니어들의 책임이 크다.

경제학자들은 화폐를 정의하는데 엄청 게으르다. 보통 '화폐는 지급수단, 가치저장수단, 계산단위의 기능을 갖는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3세기부터 지금까지 그대로다. 그것은 화폐의 정의(definition)가 아니라 기능에 관한 묘사(description)다. 그것을 정의라고 착각하면 무엇이든 지급수단으로 널리 쓰이면 곧 화폐가 된다는 착각이 생긴다. 인과관계의 역전이다.

어떤 학문에서든지 정의가 중요하다. 그런데 그 정의는 고정불변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달라진다. 예를 들어 19세기 초에는 북극에서 적도까지 거리의 1천만분의 1을 1미터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지구가 완전한 공의 형태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졌다. 그래서 지금은 "빛이 진공 상태에서 2억9천979만2천458분의 1초 동안 진행한 거리를 1미터로 정의한다. 시간과 무게의 정의도 마찬가지다.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어 왔다.

1970년대 초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 전 세계가 불태환화폐제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에 맞추어 경제학자들이 화폐를 다시 정의했어야 했다. 만일 '화폐는 국가가 지정한 계산단위이자 그것을 표현하는 증표'라고 정의했다면, 지급수단은 화폐의 본질이 아닌 부차적 기능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의자의 기능은 앉는 데 있지만, 높은 곳의 물건을 꺼낼 때 사다리 대신 쓸 수 있는 부차적 기능도 있다. 그러니까 어음이나 자기앞수표는 물론이고, 가상자산이 화폐가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상자산의 정체를 둘러싼 지금의 혼란은 경제학자들의 '지적 태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경제학자들만 탓할 수는 없다. 가상자산을 둘러싼 착각의 50%는 엔지니어들에게 있다. 분산원장(distributed ledger)이라는 출처불명의 허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비트코인의 등장을 알리는 2008년 말 사토시 나카모토의 논문에는 원장이라는 말이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 논문에서는 노드(node)라는 개념만 등장하는데, 노드는 원장이 아니다.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지폐와 주화의 원장은 없다. 그래서 돈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분실하더라도 한국은행은 도와줄 수 없다. 예금통장이나 주식증서는 다르다. 만약 실물을 분실하면, 그것의 발행기관이 원장을 확인하고 재발급한다. 즉 원장의 궁극적인 목적은 소유권을 보호하는 데 있다. 법률적으로는 '제3자에게 대항력을 갖는다'고 한다.

거의 모든 가상자산들은 해킹당하거나 분실했을 때 그것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 지폐나 주화를 잃어버린 것과 똑같다. 그러므로 분산원장이라는 개념은 허구다. 가상자산의 세계에서는 원장이 없다. 원장이 없으니 해커들의 공격목표도 없다.

가상자산 플랫폼에서 노드는 원장이라기보다 공장(factory)에 가깝다. 한국은행권은 한국조폐공사 한 군데서 제조한다면, 비트코인의 경우 전 세계에 흩어진 1만개의 공장 중 어느 한 곳에서 제조되는 것이다. 그 분산된 공장을 분산된 원장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독한 왜곡이다.

종합해 보건대 경제학자들은 화폐가 무엇인지(what)에 대한 고민이 적다. 화폐가 어떻게(how) 쓰이는지에만 관심을 둔다. 가상자산 투자자들도 똑같은 오류에 빠져있다. 기록이 얼마나(how) 안전한가에만 관심을 갖고, 도대체 왜(why) 기록하느냐는 생각하지 않는다. 소유권 보호와 상관없는 거래의 기록행위는 심심풀이 취미활동에 불과하다. 소유권을 보호하는 데 무기력한 기록은 원장이 아니라 낙서장(scribble book)이다.

아인슈타인 가라사대 "왜(why)라는 질문이 빠진 과학이 가능한지는 모르겠는데, 억지로 있다고 가정하면, 엄청나게 원시적이고 혼란스러울 것이다."

◇ 덧붙이는 글: 가상자산에 대해 비판적인 필자는 현재 가격이 폭락했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 연말 가격 폭등이 시작되었을 때도 이 칼럼에서 지금과 비슷한 주장을 했다. 그것을 읽어보시라. '암호자산 랠리, 알고 즐기라'(https://news.einfomax.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24916) (차현진 한국은행 연구조정역)

※'노미스마(nomisma)'는 그리스어로 화폐와 명령(법)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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