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10월 13일. 건설사의 3개월짜리 'A2' 등급의 '자산유동화전자단기사채(ABSTB)'가 연 15% 수준의 호가에도 거래가 체결되지 않았다. "어? 이게 되지…."
#.10월 17일. 'A3' 등급의 ABSTB 1개월물은 발행일 당일 연 12.2%를 찍었다. 조금 더 큰 중형증권사가 매입확약을 약속한 3개월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은 연 8.20%에 호가를 설정하고도 거래를 모두 체결하지 못했다. 지난주 초만 하더라도 최고 등급의 이 정도면 연 6% 수준의 금리를 형성했다.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유동화물시장 내 불안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위기다"
#10월 18일. 증권사들의 '흑자도산' 그림자가 짙어졌다. 콜자금을 제외하고 증권사 자금조달원인 CP도 막혔다. CP 금리는 치솟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다. 돈은 벌지만, 돈이 돌지 않는, 그야말로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자금 담당자들은 출근하자마자 실시간으로 자금시장을 체크한다. 손해를 무릅쓰고 고금리를 내건 절박한 물건이 어디서 나오는지 긴장의 연속이다. "자금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데, 없다"
그동안 필요한 돈 계획이 일정대로 돌아갔기 때문에 증권사들은 자금 부분에 특별히 신경 써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최고재무책임자(CFO)라는 개념조차 없는 중소형사 자금담당은 대형사 자금 베테랑에게 자문해본다.

금융투자협회도 바빠졌다. 자금담당과 핫라인을 구축하고, 금투협회장은 한국은행 총재를 만나 회사채시장의 유동성 경색 등에 대한 해법으로 금융안정특별대출 제도 재가동을 요청한다. 협회장이 직접 '최종 대부자'인 한은의 총재를 만난 것은 사실상 처음이다.

#10월 19일. 급기야 '건설사 부도 이야기가 나오고, 증권사 매물로 나와 이곳저곳 태핑하고 있다'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정보'라는 이름으로 돌았다.

중소형 증권사 자금 담당에게는 "어떤 상황이에요?" 전화, 메신저가 빗발쳤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급히 진화에 나서본다. 문제가 사실 없지 않다. 떠안아야 하는 PF 유동화물은 여기저기서 터지고 있다. 막아야 할 돈은 계속 돌아오는데, 자금 융통이 되지 않는다. 은행 대출은 기대도 할 수 없다.

CFO는 피가 마른다. 네트워크를 활용해 그나마 돈이 있는 기관에 CP를 사달라고 도움을 요청해보지만, 반응은 싸늘하다. "그야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다. 정부에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대형증권사 CFO '단톡방'도 바빠졌다. "거기는 어때요?" 우려가 대형사까지 덮치는 분위기다. 지난 2020년 3월 주가연계증권(ELS) 마진콜 사태로 달러를 찾으러 다녔던,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10월 20일. 금융위는 단기자금시장 안정을 위해 채권시장안정펀드(이하 채안펀드) 여유 재원을 신속히 매입하겠다고 발표했다. 금융위원장 특별 메시지를 통해 사실상 구두 개입을 한 것이다. 발표 후 국채선물이 오르는 등 국채시장은 안정됐지만, 신용 문제아로 낙인찍혀버린 중소형 증권사는 위기에 처한다.

#.10월 21일. 소형 증권사가 확약했던 'A2' PF ABSTB 3개월물은 발행 당일 연 11.1%의 금리를 형성했다. 연 8~9%에 화들짝 놀랐던 때는 지나갔다. 대책이 나왔어도 두 자릿수 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10월 23일 일요일. 상황은 급박해졌다. 정부는 '50조+α'의 대책을 내놓는다. 자금공급 수단을 총동원했지만, 자금경색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사태의 중심에 섰던 강원도 보증물 일부는 'A1(sf)' 최고등급을 달고도 연 13% 금리를 형성했다.

#10월 27일, 한은마저 나섰다. 한은은 증권사와 증금을 대상으로 총 6조원 규모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을 실시키로 했다.

주말 정부 대책 이후 증권사들은 릴레이 회의에 들어간다. 위험한 '아우' 도와주겠다고 회삿돈을 빼는 게 이사회를 통과할 수 있겠는가, 배임은 아니냐는 '형님' 대형 증권사들의 볼멘소리. 괜히 자금 지원받았다가 정말 망할 위기에 처한 회사로 찍힐 수 있다는 아우 중소형 증권사들의 고민으로 대치 상태도 있었다. 그러나 최소 자금만 남겨놓고 부동산 호황을 타고 수익만 쫓던 중소형사가 실적 잔치를 벌일 때, 위기관리에 들어가 기회를 포기하던 대형 증권사들의 기회비용 지적은 잠깐 접어두기로 했다. 업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는 만큼 팔리지 않는 중소형 증권사의 PF ABCP를 시장에서 소화될 수 있도록 대형사들은 도움을 주기로 했다.
지난 9월 28일. 강원도가 춘천시 중도 일원에 레고랜드 테마파크 기반조성사업을 했던 강원중도개발공사(GJC)에 대해 법원에 회생신청하기로 한 지 딱 한 달이다. 악몽의 10월, 증권사 CFO들은 바빴다. 과거 이렇다 할 존재 이유를 찾지 못했던 CFO의 중요성이 위기로 급부상했다. 자금부조차 두지 않았던 중소형 증권사들은 미래의 CFO들을 찾고 있다. 이번 악몽의 여진이 해를 넘길 것 같은 불안감에서다.

'금융 무지'에서 비롯된 '정치 리스크'가 금융시장을 삼켰다는 지적들이 나온다. 우리는 금융시장에서의 '신뢰'를 잃게 됐다. 한 달 전 발생한 일이 최근 1~2주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는 등 '역주행'하는 금융시장이 난감하겠지만, 시장과 당사자들이 처한 난감함은 "미안하게 됐다"는 말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요즘 세간에는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란 노래가 역주행하고 있다. 올 3월에 발표된 곡이 각종 축제 무대를 통해 입소문을 타게 됐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 노래의 가사다. 연인이 이별한 상황을 노래하고 있는데, 그 상황을 '사건의 지평선'으로 표현했다.

사건의 지평선이란 일반상대성이론에 나오는 내부와 외부를 나누는 경계선으로, 블랙홀의 경계처럼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외부에서는 어떠한 정보도 감지할 수 없다는 개념이다. 이별하는 상황, 그 이후가 어떨지 몰라 몹시 불안하지만, 이제는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가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에는 과거 사랑의 과정이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아있고, 그래서 충분히 '산뜻한 안녕'을 노래할 수 있지만, 지금 금융시장에서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가야 할 우리는 산뜻한 안녕을 외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투자금융부장)
sykw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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