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피혜림 기자 = "Impracticable at this time"(이번엔 실행 불가능하다)
흥국생명이 지난 1일 싱가포르 거래소에 5억 달러 규모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공시하며 언급한 말이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다는 말이었다.

엿새 만에 상황은 반전됐다. 흥국생명은 콜옵션 행사를 재공시했다. 차환이 아닌 상환에서 방법을 찾았다.

8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이날 주요 시중은행 등 금융기관은 4천억 원을 웃도는 흥국생명 환매조건부채권(RP)을 사들일 예정이다.

RP는 발행자가 일정 기간이 지난 뒤 되사는 조건으로 발행하는 단기 채권이다. 전일 은행들은 해당 거래를 위해 흥국생명에 크레디트익스포저(CE)를 부여했다. 흥국생명은 자체 자금과 RP 매입을 통해 8천억 원 상당의 유동성을 마련했다.

최근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이행은 레고랜드 사태, 북한을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와 함께 국내 채권시장을 압박하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요인으로 해석됐다.

시장 관행을 깬 흥국생명의 잘못은 명확했다.

신종자본증권이 법상 자본으로 인정되는 것은 영구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긴 듀레이션을 감내할 투자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콜옵션은 그 듀레이션에 붙는 안전장치다. 투자자들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후에 콜옵션을 행사한다는 담보를 디폴트 값으로 생각하고 신종자본증권을 사들인다.

시장과 사전에 충분히 소통했다면 지금과 같은 파장으로까지 확산하진 않았다는 게 시장 참가자들의 중론이다.

채권시장 한 관계자는 "흥국생명 사태로 자본증권 IR이 더 타이트해졌다"며 "DB생명처럼 계약 조건을 변경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투자자들과) 사전 교감이 더 충분히 이뤄졌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흥국생명의 콜옵션 미행사는 연일 외신에 보도됐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국내 보험사를 둘러싼 우려도 회자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4일 흥국생명의 신종자본증권 콜옵션 미행사로 한국 보험사들의 자금 조달 여건이 악화할 것이라는 전망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실제로 흥국생명 콜옵션 미행사 소식이 확산하고 한화생명, 교보생명 등 국내 주요 생보사들의 채권 가격은 순간적이나마 급락하기도 했다. 장중 한때 8~9%대 가격이 형성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흥국생명 사태는 채권 시장의 이슈일 뿐 국내 보험사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방증은 아니다.

2년 전만 해도 새롭게 도입되는 킥스 체제 아래서 국내 보험사의 재무구조가 악화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당시는 국고채 10년물 금리가 2%가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최근 국고채 10년물은 4%를 돌파했다. 킥스 도입으로 보험사의 자본 건전성이 차별화될 순 있겠지만 무조건 악화한다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저금리로 인한 역마진 부채로 킥스 체제 아래서의 보험사 건전성을 걱정하던 시절은 지났다"며 "지금은 200bp 이상 금리가 올랐다. 자본 규제가 강화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상황이 악화하는 것은 아닌데 흥국생명 이슈와 연계돼 보험산업 전체를 어둡게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내다봤다.

SC를 비롯해 최근 글로벌 금융시장에서는 콜옵션 행사를 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19년 스페인 산탄데르, 2020년 도이치은행, 영국 로이드 은행도 콜옵션을 미이행한 전례가 있는 대형 은행들이다. 올해도 독일, 호주, 이탈리아 곳곳에서 은행들이 콜옵션을 포기했다.

논란은 있었지만, 당시 시장에선 이들에 대해 합리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호주와 같은 금융당국은 금융회사의 무리한 콜옵션 이행보단 경제적 합리성을 더 높게 평가하기도 한다.

흥국생명 역시 발행의 문제였다. 최근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자본증권 발행은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은 게 현실이다.

또 다른 증권사 연구원은 "시장의 성격이 달라졌는데, 관행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명제가 맞는지에 대해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살아있는 시장과 잘만 소통한다면 관행으로 여겨지는 것들도 옵션이 될 수 있다"며 "흥국생명 사태가 채권시장에 영향을 줬지만, 국내 보험사의 디폴트 위험이나 상환 이슈로 확산해선 안 된다. 시장이 어려울수록 사태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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