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결국 YB가 맞았다"
2015년, 김용범 메리츠화재 부회장이 그룹의 보험 사업을 맡으면서 채권 시장에선 그의 이름이 숱하게 회자했다. 메리츠의 이름으로 채권 매각이 단행될 때마다 시장에선 그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궁금해했다.

보험업계의 치킨게임으로 수익성이 눈에 띄게 악화했던 2018년과 2019년, 급격히 늘어난 매출 탓에 보험 손익 적자가 커진 메리츠화재는 대규모 채권 매각을 단행했다.

비단 메리츠화재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채권 대신 사옥을 판 삼성을 제외하고 상위 손해보험사들 모두 채권 매각을 단행했다.

당시 메리츠화재의 투자수익률은 10%에 육박했다. 당시 두 자릿수 투자수익률을 내는 보험사는 없었다. 지금도 그렇다.

물론 채권 매각이 주춤해진 이후 투자수익률은 평년 수준을 되찾았다.

시장에선 당시 메리츠화재의 선택을 김 부회장의 악수(惡手)로 봤다. 금리 인상으로 채권 평가손이 커져 기타포괄손익이 조(兆) 단위 적자를 기록하리란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이듬해, 메리츠화재는 보유하고 있던 국채의 80%를 매도가능증권에서 만기보유증권으로 전환했다. 묘수였다. 그 덕에 금리 상승으로 인한 이자 수익만 반영될 뿐 평가손익은 재무제표에서 제외됐다. 혹자는 '얄밉다' 했고 혹자는 '과도한 애니멀 스피릿(동물적 감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메리츠화재의 채권 매각을 향해 쓴소리를 뱉던 시장 사람들은 지금 '결국 YB가 맞았다'며 당시의 시장을 회고했다.

김 부회장은 국내 채권 운용 1세대다. 1989년 대한생명 증권부 투자분석팀에서 채권 시장에 발을 디뎠다. 이후 CS(옛 CSFB) 채권트레이딩 이사와 삼성화재 펀드운용부장, 삼성투자신탁운용 채권운용 팀장과 채권운용 CIO 등을 거쳤다. 2007년에는 삼성증권에 둥지를 틀고 채권사업부를 이끌었다.

채권시장에서 그는 유독 숫자에 밝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메리츠금융그룹과의 인연은 2011년부터다. 조정호 회장은 숫자에 밝은 그를 메리츠증권[008560](옛 메리츠종금증권) 최고재무관리자(CFO)에 선임했다. 8개월 만에 부사장으로 승진한 그는 이듬해 바로 공동 대표이사에 올랐다. 그리고 2013년, 메리츠금융지주[138040]에서 최고운영책임자(COO)가 돼 그룹 전반의 경영에 참여했다.

이후 김 부회장은 지주 사장과 증권 사장을 겸임하다가 2015년 2월부터 메리츠화재를 이끌었다. 그룹 부회장으로 승진한 것은 그로부터 2년 뒤다. 그는 7년째 메리츠화재를 이끌며 업계 최장수 최고경영자(CEO) 반열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보험업계에선 메리츠화재를 김 부회장 취임 전과 후로 나눈다.

"현장에 있는 사람이 전문가다. 날 설득할 수 있는 제안을 해라"
메리츠화재 수장에 오른 김 부회장은 취임 직후 조직을 완전히 변모케 했다.

그는 기존의 보고 문화를 없애고 모든 회의 시간을 30분 이내로 줄였다. 야근도 없앴다. 사무실에 켜진 불보단 이메일과 문자로 임직원과 이야기하며 현장을 챙겼다.

김 부회장 체제의 메리츠화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변화는 단연 '보상'이다.

그는 경영의 본질은 경쟁 환경을 만들고 우수한 직원에겐 충분한 인센티브로 보상하는 것을 당연한 성장 방식으로 여겼다.

김 부회장은 '아메바 경영'으로 이를 구현했다. 이나모리 가즈오 일본 교세라 그룹 명예회장이 주창한 아메바 경영은 조직 구성원 개개인의 적극적인 목표 의식 아래 평가를 통해 걸맞은 보상을 받도록 하는 게 골자다. 이 경영철학을 배우고자 김 부회장은 수시로 일본행 비행기에 올랐다고 한다.

뻔한 족보의 재탕을 싫어하는 김 부회장은 지난 7월, 업계 1위 등극을 선언했다. 2025년까지 장기인보험 매출과 당기순이익, 시가총액 등으로 손해보험 업계 1위에 오르겠다는 게 김 부회장의 목표다. 그간 '넘사벽'으로 불리던 삼성화재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 업계에선 꽤 회자했다.

그리고 지난 14일, 올해 3분기 실적발표로 메리츠화재는 다시 한번 업계를 놀라게 했다. 7분기 연속 분기별 최대 당기순이익을 경신하며 처음으로 업계 2위로 올라섰다. 그의 공언(公言)이 공언(空言)이 아니었던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메리츠금융지주는 국내 자본시장에 없던 선언을 했다. 상장사인 메리츠증권과 메리츠화재를 완전 자회사로 편입하고 이들을 상장 폐지하겠다는 발표였다. 쪼개기 상장으로 기업가치 부풀리기가 만연했던 국내 여느 기업과는 정반대 행보를 두고 시장은 상한가로 화답했다. 상장 주식 기준으로 메리츠 기업가치는 3조원이나 늘어났다.

이번 결정의 핵심은 메리츠금융그룹을 자녀에게 승계하지 않겠다는 조정호 회장의 통 큰 결단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자회사의 이익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조 회장은 이를 위해 증권과 화재의 이익이 2년 이상 1조 원을 넘는 시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메리츠증권과 메리츠화재가 1조 클럽에 가입하는 데 김 부회장의 공은 컸다. 시장에선 CFO를 지낸 그를, 조 회장이 통 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브레인으로 보고 있다.

김 부회장을 꾸미는 수식어는 많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대표 집단 중 하나인 '82학번 똥파리' 이자 국내 채권 운용 1세대 스타고, 보험업계 연봉 킹이다. 골프는 즐기지 않지만, 운동과 책을 좋아하는 그는 솔직함(straightforward)을 무기로 삼는 직설가다. 숫자로 말하길 좋아하는 실용주의자이자 합리주의자인 그는 권위와 격식을 가장 싫어한다. 그는 여전히 경영에 있어서만큼의 야수의 본능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야수성은 원대하고 강렬한 욕망이자 건강한 분노다"
몇 년 전 카이스트에서 열린 금융권 CEO 초청 강연에서 김 부회장이 꺼낸 말이다. 그는 여전히 조직원들에게 구태에서 벗어난 야수성을 강조한다. 시장은 여전히 그의 야수성을 지켜보고 있다.




jsje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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