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채권 대학살'의 시간이었던 작년, '그들만의 리그'라고 여겼던 채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이해의 수준이 예전과 비교해 확실히 깊어졌다.

영구채, 하이브리드채권, 코코본드로 불리는 신종자본증권은 과장하자면 전 국민의 채권이 됐다. 미래의 돈을 현재로 가져온다는 점에서 기존 채권과 개념은 대략 같다. 다만 조건부 자본증권답게 자본증권을 발행한다는 점, 조건과 시장에서 통용되는 규칙에서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간 우리는 채권이라고 하면 회사채 정도를 떠올렸다. 2001년 이후 국내 발행시장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삼성전자를 비롯해 회사채를 발행하지 않는 대기업이 많다 보니, 익숙한 건 한전채, 은행채, 카드채 정도였다.

흥국생명 사태가 일깨워 준 건 우리도 글로벌 자본시장의 '키 플레이어'라는 사실이다. 이제 국내 자본시장에서 일어나는 일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시아나 전 세계를 대표하지는 않아도, 아시아 투심을 엿볼 수 있는 시장 정도로는 커졌다.

그 중심에는 끊임없이 시장을 두드렸던 '한국물 전사들'이 있다. 투자처 다변화를 위해 국가 대표로 한국물(korean paper) 발행에 나선 곳들이다. 한국수출입은행(켁심·KEXIM)을 시작으로 KDB산업은행, 한국석유공사, 그리고 SK하이닉스, 우리은행, 신한카드, 현대캐피탈 등 민간 기업들이다.

이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대한민국 간판을 내걸고 '바이코리아'를 외친다. 2000년대 전후의 '바이코리아'와는 사뭇 다르다. 과거 현대증권이 내걸었던 '바이코리아'는 사실상 어려운 시기 국내 주식을 사자는, 이후 IMF 사태 당시 '금 모으기'와 같은 애국심에 호소하는 성격이 강했다면 지금은 온전한 경쟁력으로만 덤비는 외침이다.

수출입은행은 그 선봉장이었다. 발행 기록을 스스로 경신하며 한국물 시장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지난해 초 30억 달러 규모의 달러채 발행 기록을 새로 썼던 수출입은행은 올해 첫 발행에서 35억 달러 규모로 트랙 레코드를 확보했다.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최대 규모의 한국물 발행 기록은 정부가 1998년 외환위기 당시 환율 안정을 위해 조달한 40억 달러 규모의 외평채다. 수출입은행은 여기에 조금 못미치기는 해도 정부를 제외한 우리나라 발행사가 해외투자자를 대상으로 한 역대 최대 외화채권 발행 규모라는 기록을 썼다.

수출입은행의 '역대급' 발행 성공 덕에 연초 줄줄이 예정된 한국물 발행은 지금까지 모두 성공적으로 끝났다. 포스코(Baa1)와 SK하이닉스, 우리은행(Aa3), 현대캐피탈(Baa1), 한국주택금융공사(유로화 커버드본드, Aaa) 등은 이번달 공모 한국물 발행에서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했던 수요를 확인하고 있다. 글로벌 채권시장 호황과 그동안 억눌렸던 보복 수요가 있다고 해도, 아시아 투자자는 물론 글로벌 투자자 모두를 사로잡았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특히 한국물 시장이 레고랜드, 흥국생명 사태로 엄청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한국물 시장은 지난해 10월 말 KDB산업은행의 리 오픈 딜을 끝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통상 11월 중순까지 발행이 이어지지만, 시장 분위기가 싸늘한 탓에 기업들은 줄줄이 조달 연기를 택했다. 이후 캥거루본드(호주 달러 채권)와 스위스프랑 채권 발행 등이 간간이 이어진 게 전부였다.

이로 인해 한국물 시장에는 두 달여 간의 공백이 생겼다. 시장 변동성이 상당해 기관도 예년보다 일찍 북 클로징에 나서 유통시장에서 분위기를 확인하기도 쉽지 않았다.

한 치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만큼 관련 업계에서는 올해 포문을 열 수출입은행 외화채 발행을 주시했다. 수출입은행은 우량 신용등급을 보유한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물 대표주자로 꼽히는 곳이다. 그런 만큼 향후 조달 시장의 분위기를 드러낼 가늠자가 될 것으로 봤다.

그 성공 덕에 후발 주자들도 넉넉한 유동성 속에서 일변도가 아닌 다양한 전략으로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포스코(Baa1), SK하이닉스(Baa2) 등은 수요예측에서 각각 150억 달러 이상의 주문을 확보했다. 한국물 시장에서 단 건의 딜로 100억 달러 이상의 주문을 모으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다. 이후 우리은행도 6억 달러 규모의 글로벌본드에서 88억 달러의 주문을 모으며 역대 최대 흥행 기록을 새로 썼다.


작년 9월, 25억 달러 한국물 성과




이노우에 다케히코 작가의 불세출 명작 만화 슬램덩크가 최근 '더 퍼스트 슬램덩크' 극장판으로 나왔다. 이번 영화에는 없지만, 만화의 시작 부분에는 주인공 강백호가 농구 인생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드러나는데, 이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강백호가 짝사랑하는 채소연이다. 채소연의 "농구, 좋아하세요?"라는 수줍은 물음은 슬램덩크 서사의 묵직한 시작을 알렸고, 강백호는 봄의 벚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마지막 산왕공업고와의 대결에서 열정적인 농구 인생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우리 자본시장에서, 슬램덩크에서의 농구라는 단어를 채권으로 치환할 수 있을 만한 채권에 대한 열정의 인물을 꼽자면 단연 수출입은행의 이동훈 전 자금시장단장이다.

그는 채권 시장에서 '더 퍼스트'였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 송태섭의 포지션 포인트가드처럼, 넓은 시야로 경기 전체를 조율하고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부임한 첫 해인 2021년 국내 금융기관 최초로 20년물 달러채를 발행했다. 중국을 제외한 아시아 시장에서의 첫 도전은 한국물 시장에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국내 증권사에 처음으로 맨데이트를 부여해 '토종 IB'를 육성하는데도 앞장서 왔다. 그간 역량 부족으로 엄두를 내지 못했던 국내 증권사들이 한국물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것도 실은 그 덕분이었다.

그는 매년 '점보 딜'의 역사를 써왔다. 통상 한국물 시장에선 10억 달러 규모만 넘어도 '빅딜'이었는데, 그가 연이어 발행 규모를 늘리며 수출입은행은 정부 이외 최초의 '점보 딜'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한국물 시장에서 좀처럼 발행되지 않던 블루본드 시장을 개척한 것도 그다. 그는 그린본드에서 한발 더 나아간 블루본드를 올해 수출입은행 첫 발행물에 섞으며 발행 시장의 ESG 트렌드를 이끌었다.


수출입은행 자금운용단. 왼쪽에서 두번째가 이동훈 전 단장




스포일러 주의. 영화에서는 송태섭이 산왕전을 끝내고 미국에 진출하는데, 미국 뉴욕 생활을 마치고 복귀해 지난 2년여간 한국물 시장의 위상을 바꾼 이 단장은 이제 수출입은행 다른 분야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 그리고 그가 연 '더 퍼스트'는 수출입은행 자금운용단의 '더 세컨드', '더 서드'로 이어진다. (투자금융부장)

sykw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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