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수도권 공대생에게 물었다. "다시 수능 볼 수 있다면, 지역 어디든 의대 갈래? 대기업 취업 보장 반도체 학과 갈래?"
"무조건 의대지. 밸붕(밸런스 붕괴)인데."
국내 주요 반도체 기업과 정부, 대학들이 야심 차게 만든 반도체 계약학과에서 사상 초유의 '전원 등록 포기' 사태가 발생했다. 서울권 대학에서만 약 130여명을 뽑았는데 추가 합격자 비율이 정원 대비 2배가 넘는 곳도 있다. 수험생 언어로 표현하자면, '두 바퀴'는 돌았단 얘기다.

현재 서울에서는 연세대와 고려대, 서강대, 한양대에서 반도체 계약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연세대는 삼성전자, 나머지 학교들은 SK하이닉스와 손을 잡았다.

기업들이 우수 인력을 입도선매하기 위해 만든 산학 연계 프로그램이다. 입학생들은 해당 기업으로부터 학부 재학 기간 장학금은 받는 것은 물론, 10만~30만원 수준의 생활비도 쥐어진다.

삼성전자의 경우, 1~2학년 때는 등록금을 장학금 형식으로 전액 준다. 입사 준비를 시작하는 3~4학년에는 '대여장학생'으로 일종의 계약금처럼 학비를 지원한다. 또, 일반 입사지원자들과 마찬가지로 직무적성검사(GSAT)도 통과해야 비로소 정식 사원이 된다.

청년 고용률이 50%도 되지 않는 요즘 같은 시대에 문과생들 입장에서는 그저 부러울 뿐이다. 오죽하면 '문송합니다'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문과라서 죄송합니다." 그래, 문과는 기업이 보기엔 할 줄 아는 게 없다. 없다는 말이 과하다면 '많지 않다.' 문과도 계약학과만 있다면 그야말로 박 터질 텐데.
공대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저 정도 학교면 가만히 있어도 삼성, SK 취직은 돼." 듣고 보니 그렇다. 2010년대에도, 또 그전에도, 저 정도 명문대 공대생들은 학사 경고를 맞아도 어지간하면 문송들은 바라보기도 힘든 대기업에 척척 들어가더라.
높은 커트라인도 오히려 고급 인력이 이탈하는 이유로 지목된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2년 수능에서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와 한양대 반도체공학과의 대학수학능력시험 표준 점수 합격선은 의대 다음이었다고 한다. 삼성전자 계약학과인 연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의예과와 치의예, 약학과에 이어 지원 가능 점수가 가장 높았다.

최상위권 학생들이 의대와 계약학과를 같이 쓸만하단 얘기다. 처음 나온 질문을 다시 물어본다. 의대랑 계약학과 둘 다 붙으면 어디로 가겠는가.
현재 대학에 진학하는 세대의 특성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95년~2010년 사이에 태어났다는 '제너레이션 Z'다. 10명 중의 8명은 '조용한 사직'을 직장 생활 최대 미덕으로 꼽고 사내 의사소통을 '메신저감옥', 일에 잠식되는 상태를 '일며들다'며 비꼰다.

그런 가치를 가진 세대가 대기업 직원이 되기 위해 20살부터 취업 연계 계약학과에 발목을 잡히고 싶을리 만무하다. 게다가 대기업 평균 퇴직 연령은 겨우 50세가 될까 말까다. 청운지사가 보기엔 너무 뻔한 미래일지도 모르겠다.

그 뻔하지만, 그래도 전설적인 길을 걸어온 직장 선배들은 이런 현실에 국내 반도체 업계의 미래가 참담하다고 우려한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설계의 전설 김기남 삼성전자 SAIT(구 종합기술원) 회장과 박정호 SK하이닉스 부회장이다.

김기남 회장은 최근 한림대 도헌학술원 개원 기념 심포지엄에서 "반도체 계약학과도 만들고 무지 노력했는데 잘 안된다"며 "기업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국가, 학계, 산업계가 공동으로 노력해 선순환 사이클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사는 정년이 없고, 기업은 만 60세라는데. 양자택일의 균형을 맞추려면 취업 보장 외의 메리트가 있어야 할 것이다. (기업금융부 김경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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