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지서 기자 = 2002년 봄, 신한금융지주가 설립된 이듬해 최용호 당시 재경부 은행과 사무관의 가장 큰 당면과제는 조흥은행이었다. 지금의 변양호 VIG파트너스 고문이 금융정책국장을,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은행과장을 맡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고자 추진된 제2 단계 은행 구조조정으로 이른바 '조·상·제·한·서' 시대는 저물었다. 가장 많은 공적자금이 투입된 제일은행은 미국계 사모펀드 뉴브리지캐피털에 이어 영국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인수돼 SC제일은행이 됐다. 서울은행은 하나은행과 합병했고, 한일·상업·한빛은행은 평화은행까지 흡수하며 지금의 우리은행이 됐다.

국민은행이 주택은행과 합병해 은행의 대형화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드는 과정에서 신한금융지주의 조흥은행 인수합병(M&A)은 사실상 마지막 딜이었다.

딜은 녹록지 않았다. 조흥은행의 재무제표는 투명하지 않았고, 실사 과정에서 터진 카드채 사태로 시장이 흔들리며 제대로 된 기업가치를 산정하기도 어려웠다.

당시 최 사무관은 2조7천179억 원의 나랏돈이 투입된 조흥은행 딜이 순탄치 않을 때마다 '시장의 논리'와 '관의 명분'을 관통하는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잠재 부실이 있는 조흥은행의 북 밸류가 현실적으로 반영될 수 있도록 인수가 납입 시점을 조정했고, 예금보험공사가 매각 대금의 일부를 상환전환우선주(RCPS)로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 덕에 신한금융지주는 조흥은행 인수 자금을 수월하게 마련했고, 정부는 공적자금을 100% 회수한 데 더해 훗날 RCPS를 보통주로 전환하며 얻은 이익으로 넉넉한 이자까지 받게 됐다.

그렇게 신한은행은 자신보다 덩치가 큰 조흥은행을 인수·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최 사무관은 그 딜로 재무 관료들 사이에서 스타 사무관으로 떠올랐다.

그는 2005년 정부가 발표한 중소기업 금융지원체계 개편방안도 주도했다. 현재의 신용보증제도 근간이 된 당시 개편안은 거액의 중견·장기 이용기업의 보증을 축소하고 혁신형 중소기업에 대한 보증을 확대하는 한편 민간 금융기관과 신용보증기금 등 정부 유관기관의 역할을 강화하는 게 핵심이었다.

전자금융법과 금융회사 지배구조법도 그의 손을 거쳤다.

특히 전자금융법은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디지털뱅킹의 개념조차 뚜렷하지 않을 시기에 제정된 첫 법안이었다. 당시 최 사무관은 전자금융거래의 질서를 잡아줄 기본법이 될 전자금융법의 조문 하나하나를 직접 고민했다.

지난 2014년, 재무 관료들은 다시 한번 그에게 엄지를 치켜세웠다. 당시 서민금융과장이던 그는 그해 발생한 대규모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태의 해결사로 투입돼 조직이 무한 신뢰하게 되는 업무 능력을 입증했다.

지난 22일, 서울아산병원에 차려진 그의 빈소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최상목 경제수석과 추경호 부총리, 김주현 금융위원장, 이복현 금감원장은 물론 임종룡·최종구·고승범 전 금융위원장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최용호라는 이름이 재무 관료들 사이에서 갖는 존재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모두가 최용호를 이야기하기 바빴다.

그는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이 모인 재무 관료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으로 똑똑했다. 냉정한 상황 인식과 주저함이 없는 결단력, 발생 가능한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는 완벽함은 그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빠른 머리 회전으로 정확하지 않은 상대의 의견에 속사포 같은 비판을 내놓지만, 언제나 대안이 있었다. 그래서 장·차관들은 국회에 갈 때마다 여러 명의 국·과장보다, 최용호 단 한 명을 원했다.

완벽주의자였던 그는 누구보다 따뜻했다. 엄격하게 후배들을 가르쳤지만, 모두가 그에게 배우고 싶어 했다. '최용호 사관학교'에서 살아남은 사무관은 곧 금융위 엘리트라는 공식은 현재진행형이다. 혹독한 가르침에 그를 멀리할 법도 하지만, 후배들은 그를 그저 딸아이의 학용품을 잘못 사다 주고 발을 동동 구르는 딸바보로 기억했다.

행정고시 41회,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그를 보내지 못한 경제관료 선후배들의 슬픔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난 1월, 금융안정지원단장으로 복귀할 때만 해도 이렇게 빨리 그와 헤어지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한국 정부는 최고의 자산을 잃었다"
이날 빈소를 찾은 한 전직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그 장관은 경제금융 위기는 항상 반복되며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것이 경제관료의 숙명이지만, 그보다 더 큰 책무는 미래의 금융위기를 극복할 후배 재무관료를 길러내는 일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용호 단장은 금융위가 육성한 몇 안 되는 소중한 자산이었다.



jsjeong@yna.co.kr
(끝)

본 기사는 인포맥스 금융정보 단말기에서 09시 31분에 서비스된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연합인포맥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