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김정현 기자 =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 2018년 저서 '초격차'에서 부서간 사일로(칸막이)를 없애기 위한 방법으로 부서장의 교차 배치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실적이 좋지 않은 회사나 부서의 공통점은 모두 사일로처럼 사업부서와 인력자원이 분리돼 있다는 것"이라며 "이럴 경우 제가 사용하는 특단의 대책이 있다. 사일로에 소속돼 있는 인력, 특히 책임자를 서로 교차 배치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제품 개발의 왕'을 그 사일로에서 차출해 '제조의 왕' 자리에 앉혀주는 것"이라며 "그것도 본인이 인지하지 못하게 전광석화처럼 인사발령을 내버린다"고도 했다.

지난 26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파격 인사를 보면서 권 회장이 강조했던 이 구절이 떠올랐다.

한은은 이번 정기 인사에서 최창호 전 조사국장을 통화정책국장에 임명했다.

향후 경제를 전망하는 한은 핵심부서의 한 축인 조사국장이 또 다른 한 축인 통화정책국장으로 이동한 것은 2005년(이주열 전 총재) 이후 19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그만큼 한은의 두 축이 되는 부서 간에 교류가 많지 않았다.

한은은 이 같은 이례적인 인사를 내고 "핵심업무인 통화정책·경제전망 부서간 융합인사를 본격화함으로써 유기적 협력체계를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인사에서는 조사국과 통화정책국 간 실무진 인사 교류가 없었지만, 앞으로는 활발하게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유기적으로 업무를 해야 할 부서 간에 적극적인 인사이동을 추진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진다.

이 총재의 이 같은 파격 인사는 조사국과 통화정책국 간 정보교류 및 업무협력이 극히 부족하다는 문제의식 하에서 나왔다는 해석이다.

조사국의 경제 예측이 전망에서 그치고 통화정책국 업무에까지 활용되지 않는다는 불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이를 완화하기 위해 지난해 경제모형실을 신설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총재는 경제모형실에 거시경제 모형을 통해 조사국의 경제전망과 통화정책 운용전략 수립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라는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한은 관계자는 "경제모형을 활용해 거시경제와 통화정책 전망 등을 산출할 수 있는데 신설 경제모형실이 조사국 및 통화정책국과 두루 교류하고 공유하면 좋겠다는 측면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부서 신설부터 부서장 교차 배치까지. 통화정책국과 조사국간 부서 칸막이를 없애고자 하는 이 총재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이에 성공하려면 부서 간 교류에 앞서 역설적으로 당분간은 부서 내 소통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통화정책국 내에서다. 의도야 어떻듯 이번 인사에서 통화정책국의 힘을 빼는 듯한 모양새가 됐다. 기존 부서원의 사기가 크게 저하될 수 있다는 우려도 상당하다.

다시 권 전 회장의 초격차를 곱씹는다. 그는 부서장 교차 배치의 효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제품개발의 왕은) 제조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니 당황할 수밖에 없고, 어쩔 수 없이 새 사일로에 속한 부하 직원들의 말을 듣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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