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정책도 경제도 물 같다고 생각한다. 물은 물길을 따라간다. 앞에 방해물이 생기면 빙 둘러 간다. 웅덩이가 생기면 한참을 꼼짝 않는다. 그러다 여울을 만나면 갑자기 치고 나간다. 제 모습을 바꾸되 길을 바꾸지 않는다.

정책도 그렇다. 정면 돌파라는 게 없다. 반대 여론을 만나면 둘러 가야 한다. 시대를 잘못 만나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때를 만나면 순식간에 세상을 바꾼다"

영원한 '정책반장'의 이 말은 정책을 만드는 공무원 후배들에게 지금도 기억된다. '네임드' 선배의 이야기임을 차치하더라도, 순리를 담은 그의 이야기는 언제 어디에서나 맞는 말이다.

2014년 7월. 최경환 부총리 경제팀은 기업 이익의 일정 부분을 배당에 활용하도록 유도하는 기업소득환류세제를 도입하기로 한다.

자기자본 500억원 초과 법인(중소기업 제외)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소속 기업, 즉 재벌 계열사가 제도 시행 때부터 발생하는 당해 연도 이익의 일정 부분을, 2∼3년 등 일정 기간에 투자나 임금, 배당에 활용하지 않으면 추가 과세한다는 게 골자다. 단일세율로 10% 과세 방식이 거론됐다.

박근혜 정부의 새 경제팀인 최경환호의 방점은 이익의 과실을 기업만이 아닌 주주, 즉 가계에도 나누라는 데 있었다. 배당 등을 하지 않고 과도한 유보금을 쌓는 기업에는 세금을 물리겠다는 강력한 정책이다. 이른바 사내 유보금 과세로 불리는 이 정책은 '초이노믹스'의 핵심이다.

논란은 거셌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은 사설을 통해 기업소득환류세제가 재벌에 대한 징벌적 과세 성격이 강하고 세금으로 타격을 주겠다는 정책은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저널은 초이노믹스가 일본의 '아베노믹스'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고도 주장했다. 기업들은 경영을 왜곡시킨다고 반발했다. 기재부는 이례적으로 해당 신문에 "재벌에 대한 페널티가 아니다"고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아베노믹스는 2012년 아베 신조가 일본 총리로 취임하면서 발표한 경제 재생 프로그램이다. 일본을 장기 불황에서 벗어나게 하고,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을 이루고,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을 끊겠다는 목표로, 아베 총리는 대규모 금융 완화, 재정 정책 확대, 구조적 개혁 등 세 개의 화살을 내세웠다. 1990년대 초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일본은 장기적인 경제 불황, '잃어버린 20년'을 겪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고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시도였지만 한계를 드러냈다.

기업소득환류세제안이 나왔을 당시에는 초이노믹스를 실망스러운 정책으로 판명된 아베노믹스의 '이복 자매'로 규정될 정도로, 시장은 초이노믹스나 아베노믹스나 사실상 실패한 정책으로 평가했다. 초이노믹스의 주축이던 기업소득환류세제는 정권이 바뀌면서 폐지됐다.

 

불 뿜는 일본 증시

 

10년이 흐른 지금, 일본과 한국 증시의 화두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다. 일본의 성공을 본 국내 투자자는 물론 글로벌 투자자도 이번에는 뜨겁게 반응하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상장사들이 지배구조 보고서 등을 통해 자본의 효율적 활용과 주가 제고 방안을 자체적으로 밝히도록 하는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도쿄증권거래소는 작년 두 차례에 걸쳐 상장사 3천300여곳에 공문을 보내 PBR가 1배를 밑돌 경우 주가를 올리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공시하고 실행하라고 주문했다. PBR 1배는 순자산과 주가를 비교하는 지표인데, 1을 밑돈다는 것은 시장이 평가하는 기업가치가 청산가치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도쿄거래소는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말뿐인 압박이 아니라 실행으로도 옮겼다. 지난달 거래소 홈페이지에는 자본 비용과 주가 관련 경영 이행 리스트가 공개됐다.

다분히 일본 사례를 벤치마킹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판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도 이달 윤곽을 드러낼 것으로 보인다. PBR 등 기업가치가 저평가된 이유를 분석하고 대응전략을 수립하라는 것이다.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이 여기까지 온 데는 한국판 아베노믹스, 초이노믹스가 주춧돌이 됐다.

아베노믹스와 3개의 화살로 잘 알려진 아베 전 총리는 사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뚜렷한 주주행동주의자였다. 고령화로 활력을 잃은 일본에서 돈이 돌기를 원했던 아베의 눈에 들어온 건 상장기업이 쌓은 수백조 엔의 현금이었다. 아베는 주주자본주의를 도구로 삼아 기업의 현금을 사회로 되돌리고, 기업의 수익성을 개선해 장기 저성장을 돌파하겠다는 구상을 했다.

2014년과 2015년 스튜어드십 코드와 기업 지배구조 코드를 도입하고, 저항하던 일본 재계 단체에 맞서 아베는 꿋꿋하게 구조개혁을 추진한다. 이를 도울 해외 행동주의 펀드와도 접촉해 기업에 주주가치 제고를 요청하는 외국계 펀드를 기업 사냥꾼이 아닌 행동주의로 바꿨고, 도쿄거래소의 변화도 끌어냈다.

한 자산운용사 임원은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은 과거 기업소득환류세제와 같은 맥락이다. 그때 과격하다고 비난받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일본의 성공을 보면서 여러 사람이 공감하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도 시장도 '타이밍'이란 것이 있다. 설익었을지언정, 그때의 초이노믹스는 지금 자본시장을 뜨겁게 달구는 밸류업 프로그램의 시발점이 됐다. 누군가도 말하지 않았나. 그때는 틀리지만, 지금은 맞다고. (투자금융부장)

sykwa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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