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남승표 기자 = 전쟁이라도 벌어진 걸까. 지난해부터 한 달에 천 곳이 넘는 가정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해 주거 불안으로 내몰린다. 돌려받지 못한 금액도 수천억 원을 헤아린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통계로 잡힌 것에 한정한 피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전세보증금 총액은 1천58조원으로 추정된다.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지난해 월 평균 전세보증 사고율이 8.6%이니 매월 91조 원의 전세보증금이 제때 반환되지 못해 문제를 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끔찍한 일이다.

지난해 서울 강서구, 인천 미추홀구 등에서 대규모 전세보증금 미반환 사고가 터지자 정부도 부랴부랴 지원 대책을 마련했다.

전세사기 피해자의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는 것을 일시 정지하고 피해자가 해당 주택을 인수할 수 있도록 법률 지원을 하거나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사고 주택을 인수해 주거를 보장하는 등의 내용이다. 또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전세보증금 반환보증에 가입할 때 내야 하는 수수료를 일정 부분 지원해주는 등의 방안도 제시했다.

그럼에도 정부의 대책은 사후약방문이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국토연구원은 지난 2022년 9월 펴낸 보고서에서 전세 제도에 대해 임차인은 계약하고자 하는 주택의 전세가격이 적정한 수준인지 알기 어려우며 주택시장 변동에 따라 향후 보증금 미반환 위험이 존재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며 제도 자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저당이 있더라도 계약이 가능해 임차인이 후순위자가 될 경우 보증금을 반환받지 못할 수도 있는 불완전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불완전한 제도의 피해는 서민으로 향했다. 국토연구원은 전세사기 피해가 주로 보증금 2억원의 저가 주택에 집중됐다고 밝혔다.

이들은 전세보증금을 돌려받기 위해 법원의 문을 두드려야 했다. 하루하루 생계에 바쁜 이들에게 소송은 또 다른 부담이다. 보다 못한 야당이 정부를 향해 임대차 보증금 채권을 인수하고 피해자를 대신해 임대인과 소송을 진행하라고 요구했다. 이른바 '선구제 후회수' 방안이다.

정부는 이에 대해 '모든 사기는 평등하다'며 거부했다. 적극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사기와 제도의 허점으로 피해를 입은 전세사기를 어떻게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지만 세금을 선심 쓰듯 할 수 없다는 국토교통부의 입장은 완고했다.

장면을 2022년 7월로 돌려보자.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금융 취약층의 피해가 우려되던 시기였다. 대통령이 직접 대책 마련을 주문했다. 금융당국은 신속채무조정 청년 특례로 화답했고 이 과정에서 코인 등 '빚투'(빚내서 투자) 구제 논란이 일었다. 무모한 투기의 결과까지 정부가 지원하느냐는 취지의 비판이었다.

그러자 금융당국의 수장이 직접 나섰다.

김주현 금융위원회 위원장은 기자들과 만나 "과거 IMF 위기, 코로나 사태 등 국가 전체적으로 어려운 때에도 도덕적 해이 문제가 제기됐지만, 국민들이 힘을 모아, 이 같은 지원으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며 "조금 도와주고 채무조정을 해주면 우리 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이들이 파산으로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해주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국회에서 야당이 단독으로 선구제 후회수 방안을 담은 법률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도록 의결하자 국토교통부는 수조 원의 혈세가 투입될 뿐만 아니라 상당액을 회수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반대의견을 냈다.

놀라운 일이다. 국토교통부의 말 대로라면 현재 소송 중인 수천 명의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가망없는 소송에 시간과 비용을 들이고 있으며 정부는 이런 가망없는 소송을 지원하고 있다.

전세사기로 인해 이미 다섯 명이 세상을 떠나는 등 참극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하는 국가의 책무는 없다.

전세보증금 인수 규모가 문제가 된다면 회수 가능성 등을 따져 합리적으로 논의할 길은 얼마든지 있다. 좀 더 따뜻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도와주려는 마음을 가지라는 금융당국 수장의 말을 국토교통부가 참고했으면 한다.

눈물 보이는 전세사기 피해자들
(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전국대책위원회와 시민사회대책위원회가 28일 오전 서울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 통과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눈물을 보이고 있다. 위원회 측은 이날이 전세사기 첫번째 피해자가 세상을 떠난 지 1주기가 되는 날이라며 피해자를 위한 조속한 특별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2024.2.28 ksm7976@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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