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중앙은행 총재의 입은 차가워야 한다. 냉철하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뱉어내야 한다. 뜨거운 가슴을 제어하지 못하고 말이 앞서다 보면 사달이 나기 마련이다. 중앙은행 고유 권한인 통화정책의 파급력은 워낙 광범위한 탓에 총재의 말 한마디는 모든 경제주체와 금융시장의 심리를 뒤흔들게 된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오버 페이스가 우려된다. 평소 신중한 스타일의 이 총재 발언이 최근 거침이 없다. 한은 기준금리를 올릴 호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경제는 완연한 회복세이고, 인플레이션 우려도 작지 않다. 가계부채와 금융 불균형 문제, 자산가격 거품 논란 등 산적한 과제도 많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는 내년 언제부터인가 테이퍼링(자산매입 축소)에 나설 태세다. 금리 인상보다 인하를 선호하는 정부와 여권 정치인들도 반대할 명분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한은이 언제든 금리를 올려도 크게 이상할 건 없는 시점이다.

문제는 그 절차와 타이밍이다. 이주열 총재의 시그널링이 다소 과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리정책의 큰 그림이 바뀔 때 시장에 시그널을 주는 건 당연한 수순인데, 조급한 인상도 준다. 두 가지 단어가 가져온 해프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당분간'이란 단어다. 이 총재는 지난 5월 금통위를 마치고 가진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국내경제의 건실한 회복세가 지속될 수 있도록 '당분간은' 현재의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회견 직전에 금통위가 발표한 통화정책방향문에는 '당분간'이란 단어가 없었다. 모두발언은 통상 통방문과 내용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이 총재는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꺼내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기 금리인상 시그널을 명확히 하는 효과를 발휘한 셈이지만, 그만큼 시장의 충격도 컸다.

뒤늦게 주상영 금통위원의 깜짝 등장에서 5월 금통위 분위기를 유추해볼 수 있다. 주 위원은 지난 6월10일 열린 비통방 금통위 때 통화신용정책보고서를 의결하면서 '당분간'이라는 문구 삽입에 반대 의견을 낸 것으로 의사록을 통해 밝혀졌다. 이를 의결문에 명기까지 한 것은 이 총재와 한은 집행부의 일방적인 소통 방식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읽힌다. 5월 금통위 당시에도 주 위원 등이 문구 포함에 반대 의사를 냈을 것인데, 이 총재가 기자회견에서 이 단어를 추가한 것에 놀랐을 수 있다.

'연내'라는 단어도 내내 회자하고 있다. 이 총재는 지난 6월 24일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설명회에서 "연내 늦지 않은 시점에 통화정책을 질서 있게 정상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시장은 '당분간'이라는 단어 등으로 이미 연내 금리 인상 가능성을 열어뒀지만, 이 총재와 한은이 '연내'라는 시점을 구체화하면서 그 기대는 더 강화했다. 연내를 공식화한 의미에 대해 기자들 질문이 이어지자 이 총재는 "(연내를) 오늘 처음 언급한 건지 몰랐다"며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시장에선 이 총재가 조기 금리 인상의 당위성에만 꽂혀있음을 보여준 사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 총재의 강력한 의지가 또 한번 표출되면서 8월 금리 인상 가능성이 급부상했다. 연말 또는 내년 초 인상에 포커싱했던 채권시장은 금리 급등으로 2차 충격을 받았다.

임기가 8개월여로 다가오면서 이 총재의 마음이 급해지는 것일까. 한은 집행부는 기본적으로 매파적이다. 통화정책의 1순위 목표가 물가 안정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기준금리 인하는 가급적 늦추거나 소폭으로 하고, 인상을 통한 정상화 작업은 공격적으로 하고 싶어한다. 이런 매파 본능이 몸에 밴 '45년 한은맨'인 이주열 총재는 뿌리부터 매파인 셈이다.

그런데 이주열 총재 임기 중 기준금리를 올린 건 단 두 차례에 불과했다. 연임까지 했으니 7년이 넘는 임기 중의 일이다. 2000년대 이후 임기를 지낸 전임 총재와 비교하면 그 차이는 뚜렷해진다. 전임 김중수 총재와 이성태 총재가 임기 중 다섯 차례, 박승 총재는 네 차례 기준금리를 올렸다. 인상 횟수만으로 정책 성과를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통화당국 수장인 총재 입장에선 두고두고 신경이 쓰일 수 있는 부분이다. 초저금리 장기화에 따른 폐단이 우리나라 경제와 자산시장 곳곳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지금은 더 그렇다. 금리 인상의 호기가 찾아왔으니 이 기회를 잘 활용하고픈 욕심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정책방향에 대한 소통과정에 조급함이 엿보이는, 약간의 의도적인 실수가 나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역대 최저수준인 현 기준금리는 기회가 되면 올려야 하는 게 맞다. 기준금리 수준을 어느 정도 정상화해서 정책 여력도 만들어둬야 한다. 그렇다고 그 시그널이 과도해지면 안 될 일이다. 채권시장은 이미 세 차례 수준의 금리 인상을 프라이싱하고 있다. 은행 대출금리도 꿈틀대는 등 경제주체들에 이미 직·간접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은의 향후 금리정책 경로는 누가 봐도 상향 쪽이지만, 인상폭에 대해선 잠재 불안요인들이 적지 않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인플레에 대한 논란과 함께 델타 변이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한 위협 등으로 하반기 경제에 대한 불확실성도 작지 않다. 시장과 경제주체가 한은의 시그널로 과도한 프라이싱을 했다가 인상폭이 그 기대에 한참 못 미친다면 그에 따른 후폭풍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의도한 바 없이 순리대로, 절차대로 정상화 작업이 진행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금융시장부장 한창헌)

chh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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