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공정거래위원회가 1986년 대기업집단 제도 도입 후 처음으로 동일인(총수) 지정 기준 명문화에 나섰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다. '외국인 총수' 관련 규정이다. 쿠팡(쿠팡 Inc.)의 창업자 김범석 의장 사례가 대표적이다. 김 의장의 쿠팡 지분은 10% 안팎이지만, 의결권은 70% 넘게 보유하고 있다. 사실상 회사 의사결정의 전권을 행사하는 데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총수 지정에서 제외됐다. 개인 총수가 없으면 법인이 총수가 된다. 그래서 쿠팡의 총수는 쿠팡이다. 이 지점에서 형평성 논란이 불거진다. 국내 기업의 경우 외국인이어도 총수로 지정된 사례가 있고, 점차 늘어날 전망이기 때문이다. 미국 국적을 가진 이우현 OCI 회장이다. 이 회장은 2018년 OCI 총수로 지정됐고, 공정위는 최근 이 회장이 미국인임을 확인했음에도 총수 지위는 그대로 유지했다.


김범석 쿠팡 Inc. 대표이사 겸 이사회 의장
[출처:연합뉴스 자료사진]


◇공정위 37년 만에 총수 지정 기준 명문화…총수는 왜 정하는 걸까

공정위는 지난달 29일 '동일인 판단 기준 및 확인 절차에 관한 지침' 제정안을 마련했다. 오는 20일까지 행정예고하는 일정이다. 지난 37년간 기업집단 규제의 출발점이 되는 총수를 정확한 규정도 없이 깜깜이로 지정해왔다는 비판에서 나온 조치다.

총수를 지정하는 건 기업집단의 상호출자제한, 일감 몰아주기 등 규제를 적용하기 위함이다. 누가 총수로 지정되느냐에 따라 규제의 대상과 범위가 달라질 수 있다. 총수로 지정되면 배우자와 친인척의 보유 주식 현황은 물론이고 이들이 계열회사와 맺은 거래 내역까지 공시해야 한다. 총수가 없는 기업은 이러한 의무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총수 지정 문제는 기업 입장에서 민감한 일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누가 총수인지 명확했다. 지금은 재벌 2세를 넘어 3세, 4세로 이어지면서 지배구조가 복잡해졌다. 총수 지정 기준을 명문화할 필요가 커진 셈이다.

공정위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기업집단 최상단회사의 최다 출자자(주식을 가장 많이 보유한 자) ▲(회장, 이사회 의장 등) 기업집단의 최고직위자 ▲기업집단 경영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자 ▲기업집단 내·외부적으로 대표자로 인식되는 자 ▲(가족 간 합의 등) 동일인 승계 방침에 따라 기업집단의 동일인으로 결정된 자 등이다. 이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이런 요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총수를 지정하겠다는 것이다.


◇외국인 총수 지정 역차별 논란

공정위는 올해 초 윤석열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면서 외국인 총수 지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 명문화 과정에서도 외국인 총수 문제는 미완으로 남았다. 쿠팡의 총수는 김범석 의장이 아닌 쿠팡으로 유지됐다. 미국 국적의 김 의장을 총수로 지정했을 때 통상 마찰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 고려됐다고 한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이번 기준을 발표하면서 "쿠팡의 김 의장은 동일인으로 볼만한 실체를 갖추고 있다고 판단한다"면서도 "통상 이슈 때문에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못했던 만큼 합리적인 방안을 잘 모색해서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정위는 산업통상자원부 등 관계 부처와 협의해 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하고 '외국인 동일인 지정 기준'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자체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최혜국 대우 조항에 위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만만찮은 일이 될 것으로 보인다. 작년에도 해당 시행령 개정이 추진됐으나 관계 부처와 협의 과정에서 무산된 바 있다. 시행령 개정이 이뤄진다고 해도 미국 기업인 쿠팡의 김 의장을 총수로 지정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단 지적도 있다. 이우현 OCI 회장의 사례에 비춰봐도 형평성 논란은 끊이지 않을 전망이다. 쿠팡 역시 한국에서 대부분 매출을 일으키는 기업인데, 토종 기업만 규제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역차별 논란까지 불거진다. 재벌 3~4세가 경영 일선에 나서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 만큼 이 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총수 지정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총수 지정 제도는 해외에서 찾아보기 힘든 한국 만의 특수한 규제여서다. 1980년대와 90년대 일부 기업의 국내 시장 독점 등을 우려해 만들어진 제도였지만, 지금의 글로벌 경쟁 시대에 부합한 제도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역차별과 형평성 논란에 휩싸인 외국인 총수 지정 문제 등이 해결 기미가 안 보인다면, 이참에 근본적인 제도의 존폐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취재보도본부 기업금융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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