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자본시장법(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122조는 기업들이 주식이나 채권을 발행하기 위해 제출한 증권신고서에 대해 금융당국이 정정을 요구할 수 있는 근거를 담았다. 형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경우, 중요사항에 거짓을 기재한 경우, 중요사항을 기재하지 않은 경우, 중요사항을 기재한 것이 불분명해 투자자의 판단을 저해하거나 중대한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경우 등에 해당한다. 법에 이러한 근거 조항을 담아 놓은 것은 무엇보다 '투자자 보호' 때문일 것이다. 투자자들이 선의든 악의적이든 피해를 보지 않도록 사전적으로 관리·감독하는 것은 금융당국의 존재 목적이다. 그래서 법에 이런 조항이 담기는 것은 당연하다.

기업들이 주식이나 채권을 통해 자금을 조달할 때 중요한 기반은 기업가치와 신용도다. 투자자들의 핵심적인 투자 판단 요소 또한 기업가치와 신용도다. 기업가치와 신용도는 곧 가격이다. 그래서 발행자(기업)는 높은 기업가치와 신용도를 얻고자 한다. 더 높은 가격에 팔고 싶어하는 것이고 한 푼이라도 더 자금을 확보하고 싶어한다. 반면 투자자들은 좀 더 싼 가격에 사고 싶어한다. 자본이득 또는 자산운용 이익을 더 얻으려는 목적이다. 누가 옳으나 그르냐의 판단 영역은 아니다. 수요와 공급의 상호 경쟁이 맞물리면서 가격이 형성되는 곳이 시장이니 말이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최근 기업공개(IPO) 시장에서 벌어진 몇몇 사례는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IPO를 추진하는 게임업체 크래프톤과 체외진단업체 SD바이오센서에 이어 카카오 계열사 카카오페이가 제출한 증권신고서를 금융감독원이 잇따라 반려하면서 기재사항 정정을 요구했다. 정정요구 이유를 명확하게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공모가 산정 기준을 좀 더 명확히 기재해 달라고 했다는 게 금감원의 입장이다. 한마디로 공모가가 너무 높으니 좀 낮추라는 요구였던 셈이다. 정정요구를 받은 크래프톤은 결국 정정신고를 하면서 적정밸류를 29조1천662억원으로 5조9천73억원이나 줄였다. SD바이오센서 역시 9조105억원으로 2조7천억원이나 축소해 신고했다. 물론 크래프톤이나 SD바이오센서가 공모가를 산정하는 과정에서 고평가 논란이 빚어진 것은 사실이다. 적정밸류 산정에 흔히 사용되는 주가수익비율(PER) 배수를 계산하면서 비교 대상 피어그룹을 과도하게 높게 책정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적과 논란은 고스란히 시장에서 걸러지면 그만이다. 가격이 비싸면 투자자들은 외면할 것이고, 가격이 싸면 사지 말라고 해도 사려고 경쟁이 불붙을 것이다. 금융당국이 가격 형성 과정에 끼어들 여지를 자본시장법 어디에서도 허용하지 않는다. 증권신고서 정정요구라는 근거를 들이대면서 사실상 시장과 가격에 개입하는 꼴이 된 셈이다. 금감원이 어떤 근거를 들어 공모가가 높다고 지적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으니 알 수조차 없다. 문제는 적정밸류가 어느 정도인지를 판단할 책임과 의무 또한 금감원에는 없다는 것이다. 공모가를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정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금감원이 간접적으로라도 제시하는 것 자체가 더 큰 문제다.

증권신고서 정정요구가 가격이 낮은지, 높은지를 사전적으로 판단해 주는 요술 방망이가 된 셈이다. 그렇다면 그 과정에서 누구는 이득을 볼 테고, 누구는 손해를 볼 수도 있다. 형평성 논란으로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이는 투자자 보호라는 본래의 목적과도 배치된다. 기업들이 공모가를 산정할 때는 국내외 굴지의 증권사(IB)와 회계법인의 전문가들이 동원되고 시장 내 굵직한 투자자들의 수요와 의견도 일부 반영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결정된 가격을 두고 시장의 평가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금융당국이 주관적 판단을 통해 가격에 사사건건 개입한다면?. 증권신고서 정정요구 제도가 되레 수요예측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칼날이 될 수도 있다. 금융당국은 자본시장법에서 정해 놓은 요건에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 극히 제한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리고 개입해야 할 경우 그 근거를 명확하게 제시하고, 공시를 통해 공개해야 한다. 이를 위한 제도 개선은 필수다. 투자자 보호라는 목적이 오히려 투자자 피해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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