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오해였다. 관료 출신 금융통화위원들이 으레 그랬듯 고승범 위원의 정책성향이 비둘기파에 가까울 것으로 생각했다. 데이터보다는 정무적이고 정치적인 판단에 더 비중을 두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정책 방향에 대한 소신보다 추천 기관인 정부(금융위원회)의 입장을 대변하는 데 더 힘을 쏟을 것이란 예상도 많았다.

고 위원의 금통위 입성 당시인 5년 전 연합인포맥스는 칼럼(<한창헌의 여의도24시> 금융위 관료출신 두번째 금통위원)을 통해 경제금융 관료로서의 경험과 전문성보다는 이런 태생의 한계를 지적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보면 기우였다. 역대 관료 출신 다른 금통위원들과는 결이 많이 달랐다는 게 한국은행 안팎의 평가다.

한은 관계자들은 고 위원이 현 금통위 내 대표적인 '데이터 디펜던트(data dependent)'라고 평가한다. 그는 각종 경제와 금융 지표를 체화하고서 한은 집행부 등에도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과제를 내줬다고 한다. 통상 학계 출신 금통위원들이 이론과 지표에 강하다고 평가되지만, 이들에 못지않은 집요함을 보여온 것으로 전해진다.

취임 이후 통화정책 성향이 중도에서 매파, 강성 매파로 계속 변신을 해왔던 것도 데이터에 집중한 결과물이다. 고 위원은 취임 초기 정부 관료 출신으로 경제 성장을 중시할 것이란 근거에서 비둘기파로 분류됐지만, 이후 의사결정 과정이나 발언 등을 통해 중도 성향으로 인식됐다.

2018년 10월 금통위 이후로는 매파로 부상했다. 당시 금통위는 기준금리를 1.50%로 동결했는데, 고 위원은 이일형 위원과 함께 1.75%로 인상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당시 금리인상을 주장한 핵심 근거 역시 데이터에 근거한 '부채함정(debt trap)'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지나면서 많은 선진국은 큰 폭의 디레버리징을 경험했지만, 유독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증가세는 지속됐다는 점에 그는 주목했다. 부채가 과도하게 늘어나면, 늘어난 부채부담 탓에 금리인상이 더 어려워지는 부채함정에 빠질 수 있으니 기준금리를 올려 이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의 경고는 현실이 됐다. 기준금리를 올려야 할 때 충분히 올리지 못한 실책은 부메랑으로 돌아올 판이다. 가계부채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고, 이에 따른 집값 급등 등 금융불균형은 갈수록 심화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고강도 완화 정책은 금융불균형을 더 키운 셈이 됐다. 금리 정상화가 시급해진 상황에서 고 위원이 나홀로 깃발을 들었다. 지난 7월 금통위 때 고 위원은 금리인상을 주장하며 강성 매파로 등극했다. 이주열 총재를 비롯한 한은 집행부가 매파 본색을 드러내는 데 고 위원의 역할이 컸을 것으로 보여진다.

고 위원은 4년 임기를 지나고서 지난해 4월 한은 총재 추천을 받아 연임됐다. 한은법이 개정된 1998년 이후 금통위원으로서 처음 연임에 성공한 사례다. 그는 이제 곧 국회 인사청문회 절차를 거치면 강성 매파 금통위원의 족적을 넘어 가계부채 관리와 금융안정의 최전선을 지휘하는 금융위원장의 책무를 맡게 된다. 한국 경제의 최대 뇌관이 될 수 있는 금융불균형의 부작용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만큼 금융당국 수장으로선 최고 적임자라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금융정책 관련 다양한 과제를 수행했던 그의 경험과 전문성에 더해 금통위원을 지내면서 탄탄하게 쌓아온 이론적 무장까지, 통화당국자에서 금융당국자로의 성공적인 변신을 기대해본다. (금융시장부장 한창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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