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인포맥스) "섭섭하다".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지난달 취임 4주년 기념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공정거래위원회를 직격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해양,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인수·합병(M&A) 성사의 최종 관문인 기업결합심사가 미뤄지고 있어서다. 무엇이 그렇게도 섭섭했던 걸까. 이 회장은 유럽연합(EU) 경쟁 당국이 아마존과 구글, 페이스북 등 플랫폼 빅테크를 규제하려고 하면 미국 경쟁 당국이 보호하고 나선다는 말까지 했다. 그런데 한국 경쟁 당국(공정위)은 '다른 데 하는 거 보고 하자'는 기분이 들어서 "심히 섭섭하고 유감스럽다"는 것이다.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공정위가 '한국의 경쟁 당국이 맞느냐'는 매우 불편한 심정을 담은 말처럼 들린다. '산업재편'이라는 큰 그림은 보지 않고 공정위가 엇나가고 있다는 압박이었던 셈이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의 기업결합심사는 3년이 넘도록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중국과 카자흐스탄, 싱가포르 등 상대적으로 이해관계가 크지 않은 국가에서는 기업결합심사를 조건 없이 승인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 유럽연합(EU)은 여전히 심사 중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산은은 현대중공업 조선 지주사인 한국조선해양과 맺은 대우조선 인수 계약의 종결 기한을 또 석 달 연장했다. 벌써 4번째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의 기업결합도 똑같은 상황이다. 대한항공은 당초 주요국에서 진행한 기업결합심사를 마무리 짓고 올해 6월 30일 아시아나항공에 1조5천억원을 투입하는 유상증자에 참여할 계획이었지만 일정이 틀어졌다. 9월 30일로 계약 종결 기한을 연장했으나 다시 올해 말까지 한 번 더 연장했다. 기업결합심사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니 어쩔 수 없는 조치다. 우리나라와 미국, EU 등 필수 신고국가 9개국에 기업결합을 신고했지만, 터키와 대만, 태국에서만 심사를 통과했다. 거래를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이동걸 회장의 입장에서는 공정위에 화살을 겨눌 수밖에 없었다. 기업결합 신고 대상 국가 중 한 곳이라도 불승인 결정을 내린다면 '빅딜'은 사실상 무산된다.

하지만 두 개의 '빅딜'이 원만하게 마무리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는 게 대체적인 전망이다. 이동걸 회장의 '섭섭함'에 대한 조성욱 공정거래위원장의 답변은 지난 5일 국정감사장에서 나왔다. 조 위원장은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결합할 경우 '경쟁 제한성'이 존재한다고 했다. 일정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도 내놨다. 승인을 내주더라도 경쟁을 제한하는 요건을 제거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 수 있다는 얘기다. 그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기업결합은 무산될 수 있다는 경고인 셈이다. 그러면서 다른 국가의 경쟁 당국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조율'이 필요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M&A는 좀 더 심각해 보인다. 양사의 기업결합에 중요한 키를 쥐고 있는 EU 집행위원회는 아예 심층 조사 자체를 중단한 상태다. 유럽은 대형 선박을 가장 많이 발주하는 거대 선주들이 몰려 있는 곳이다. 이들은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이 합쳐져 초대형 조선사가 출현하는 것을 경계한다. 독점적 조선사의 출현으로 선박 가격 결정권의 갑(甲)·을(乙) 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특히 한국 조선사들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시장 독점이 강화될 것에 대해 걱정한다. EU 집행위원회가 승인 조건으로 LNG운반선 사업의 매각 또는 기술 이전 등을 독촉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인수 주체인 한국조선해양이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다.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EU는 '노(NO)'할 가능성이 크다.

산은과 정부는 대우조선과 아시아나항공의 '빅딜'이 재무적 취약 기업의 정상화를 위한 전략적 차원의 M&A라고 주장해 왔다. 일종의 도산기업 항변 이론을 적용한 것으로, 재무적으로 뛰어난 기업이 어려운 기업을 인수해 경쟁을 제한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기업 정상화를 위해 기업결합을 인정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결합이 없으면 퇴출당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과 기업결합으로 경쟁 구도가 제한되는 정도를 비교해 봤을 때 기업결합에 따른 경쟁제한 구도가 결과적으로 중립적일 수 있다는 논리다. 이러한 이론이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받아들여진 사례는 1999년 현대자동차의 기아자동차 인수였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산업합리화'와 '국제경쟁력'이라는 근거를 들어 기업결합을 승인한 사례다. 결과적으로 현대차와 기아차(현 기아)가 모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지만, 당시만 해도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받았다. 양사의 기업결합 이후 현대차그룹의 국내 시장 점유율은 70%에 육박할 정도의 독점적 상황이었다. 공정위는 두고두고 이를 '트라우마'처럼 여겼다. 이후 공정위의 스탠스는 많이 바뀌었다. 삼익악기의 영창악기 인수를 불허했고, SK텔레콤의 CJ헬로비전 인수 역시 승인해 주지 않았다. 모두 독과점에 따른 경쟁제한이 발생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삼익악기는 공정위의 조치를 법원에까지 들고 갔지만, 법원도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우리나라 공정위뿐만 아니라 EU 집행위원회도 경쟁 제한성을 유발하는 독과점에 대해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현대중공업과 대우조선 기업결합에 깐깐한 입장을 보이는 EU 집행위원회가 더 무서운 이유다. 2019년 EU 집행위원회 관계자는 한국 기자들과 만나, "M&A가 도산을 막을 수 있는지도 검토하겠지만 그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정하고 있는데 우선적 기준은 경쟁 제한성 여부다"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일종의 도산 항변 논리도 심사 시 주요한 검토 대상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결합 이후 시장 내 가격 변동을 얼마나 초래하고, 소비자에게 어느 정도의 타격을 줄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면 이동걸 회장과 산은은 그저 '섭섭하다'는 감정을 드러낼 일은 아니다. '조건부 승인' 또는 'M&A 무산'에 대비한 비상계획인 '플랜B'를 차분히 준비해야 한다. 재무적으로 취약한 기업을 M&A를 통해 정상화하기 위한 전략적 차원이라고 항변해 봐야 소용이 없다. '빅딜'을 성사시키기 위해 경쟁 당국들이 제시하는 조건을 수용하고 그에 맞는 대책을 세울 것인지, 아니면 무산에 대비한 새로운 방책을 마련할 것인지를 서둘러 찾아야 한다. 산은은 대우조선의 최대 주주며, 아시아나항공의 최대 채권자다. 감정보다 이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섭섭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기업금융부장 고유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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